#119
2026.06.30
나를 좋아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
나는 기록광이라, 감명 깊은 작품이나 인상 깊었던 사건들은 빠짐없이 기록하는 습관이 있다.
언젠가 시간이 되면 나를 좋아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 비록 현실에서 티를 내며 살진 않아도, 나처럼 정신 상태가 엉망진창인 사람들을 좋아해준다는 점은 당연히 고맙게 여길 일이다.
하지만 내가 마지막으로 누군가를 짝사랑했던 건 중고등학생 시절이고, 그 시절 이야기는 이미 네이버 블로그에 기록해뒀기 때문에 성인이 되고 나서 나를 좋아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남겨본다. 과거의 경험과 기억이 현재의 가치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며, 그 가치관이 어느 날 한순간 모래성처럼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는 사라져가는 기억을 붙들어둬야 한다.
무엇보다 내 기존의 연애는 서투름의 연속이었으니, 앞으로 다시 시작할 연애에서 더욱 성숙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했던 실수까지도 모조리 지면에 박제해둘 필요가 있다.
1.
어떤 사람을 좋아하지 않음에도 정 때문에 4년이나 사귀었으며, 애인을 볼 땐 외모보다는 성격이 중요하다고 했다. 전 애인과 여기저기 여행을 많이 다녔고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일본의 후쿠오카 여행이라고 했다. 중국 베이징도 함께 다녀왔다고 했다. 남녀불문 투덜거리는 사람을 제일 싫어한다고 했고, 애인과 사이가 틀어질 무렵 보란듯이 애인 앞에서 싫어하는 짓을 하며 유흥 업소에도 들렸다고 했다. 나에게는 천진난만하지만 속을 알 수 없고, 대문자 T 같으며, 지금까지 본 이성 중에 제일 개성이 강하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내가 혐오하는 여러 특징들이 결합된 사람이었다.
2.
친구와 운치가 훌륭한 동네에서 커피 마시는 중 노골적으로 관심을 표했다. 순교자 수준의 일방적인 사랑이었다. 나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나름 착한 사람인 것 같아서 조금이라도 그의 매력을 찾아보기 위해 골몰했다. 잠이 안 올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주로 무슨 음악을 듣는지 등등 시답잖은 질문을 했더니 내가 본인을 좋아한다는 착각에 휩싸인 모양이다.
하지만, 음, 아니다. 나는 그에게 감정적 동요가 없었다. 그리고 남자들은 상대방을 좋아하지 않아도 만날 수 있다. 소위 말하는 `먹고 버린다'는 말이 가능한 것이다. 당시에는 여성들이 지닌 순결 같은 걸 지켜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었고,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들에 억지로 매력을 찾는 것만큼이나 내게 어울리지 않는 짓은 없었다. 그래서 냅다 걷어차버렸다.
3.
영어와 불어를 잘 구사했고 파쿠르를 잘 했다. 등산을 함께 올랐을 때, 철봉에서 180도 회전하는 권법을 선보이며 나를 전율로 몰아넣었던 기억도 있다. 그가 내게 했던 말들이 당시 꽤나 신선하고 충격적이었던 듯 하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이 차갑게 식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그와 인연을 끊어낼 구실을 찾았다.
4.
우울증에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동갑내기 친구다. 내가 넌 일이 안 풀려서 우울한 게 아니라, 외로워서 우울할 뿐이라고 하니까 아니라고 고집스럽게 우기더니, 모임에서 만난 여자 두 사람에게 동시에 고백을 받으니까 아주 좋아 죽는 듯한 가벼운 모습을 보였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뭐, 나 역시 그 아이를 비웃을 처지가 못 된다. 인간이 느끼는 희노애락의 본질이란 어찌 가볍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가.
5.
눈이 작고 오토바이를 잘 타며 남성답지 않게 차분하고 수더분한 타입의 사람이었다. 두 살 연하라 나더러 누나라고 부르면서 웃는 게 예뻐, 눈이 예뻐, 피부가 좋아 등의 외모에 대한 아첨을 아끼지 않았다.
솔직히 써보자면 잠시나마 이 사람에게 끌렸다. 이 사람과 함께 지내면 행복할 것 같다는 어처구니 없는 망상까지 했다. 하지만 이 사람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만한 것들을 찾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내 깨달았다. 설레임, 새로운 감정, 이런 것들이 꼭 새로운 이성과의 만남이 될 필요는 없었다. 문득 홍콩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얻는 새로운 감각과 재미있는 일을 시작하는 상상을 해보니, 꼭 이성 친구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채울 수 있는 욕망이었다.
하여, 정중하게 고백을 거절했다. 고백을 거절하면서, 나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이야기했다. 마음이 불편했지만, 맺고 끊음은 확실하게 갈무리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가끔씩 살면서 좋은 사람을 놓친다는 기분이 들어 안타깝긴 하지만, 지나간 일에는 개의치 말아야 한다.
6.
대학교 동기. 남자들끼리 있을 때는 뭐래 이 시발 새끼야, 병신 새끼야, 나가 뒤져 라는 식으로 막말하다가 여자애들 앞에서는 괜찮아? 그랬어? 이렇게 급 다정해지는 사람이었다. 뭐, 말을 험하게 하는 건 상관없는데, 이상하게도 남자든 여자든 이성에게만 교태부리는 애들 보면 턱주가리에 주먹을 꽂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7.
세 살 연상의 외국인이었던 그는 서양인답게 시원하게 잘생긴 호감형 외모에 사람을 참 기분 좋게하는 재주가 있었다(반면 나는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기억에 남는 건, 무엇이든지 열정적인 나를 존경한다고 했다. 당시 나는 그 말을 별로 믿지 않았지만, 지금 떠오르니 기분이 묘하게 좋아지는 칭찬이었다. 그가 "너 나를 싫어하니?" 라고 순진난만한 얼굴로 물었던 기억도 난다.
막판에 내가 멍청해서 말을 좀 심하게 했고, 상처를 줬던 기억이 난다. 마음 속으로 여러번 사과했다.아무리 가슴아파도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라면 빨리 잊어버리는 게 각자의 삶에 이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