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2026.04.06
하여간 술 좋아하는 사람과는 긴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이번에 연애를 각잡고 제대로 해보니 타인에 무관심한 내 성향 자체가 결국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문제 (말하자면 원죄라고도 할 수 있겠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한 사람을 곁에 묶어둔 채 두고두고 좋아한다는 것 자체가 내게 있어선 말도 안 되는 전제였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냐 하면, 아무리 연인을 좋아한다고 한들 상대를 오로지 나만의 것으로 "소유"할 수 없다는 게 내 의견이다. 그러니까 막말로 상대 쪽에서 바람을 피우는 것 자체로는 그다지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바람을 피운다면 의리를 저버렸다는 면에서 똑같이 앙갚음을 해줘야 마땅하지만 바람을 피울지 말지에 대한 권리는 각자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어쨌든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이와 같은 방식의 연애를 선호하고 이제 그것은 당연하게 굳어진 진리이자 자연 법칙이나 다름없기에, 나 역시 의지와는 관계없이 그런 식의 연애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리 독립적이고 개인주의적이어도 말이다.
그런데... 부산으로 출장 내려간 날, 숙소로 돌아와서 남자친구랑 오랜만에 통화를 하는데....
뜬금없이 택시가 치고 실실 쪼개면서 튀었다는 게 아닌가.
상대방: 나 택시에 치였어.... 치였다고! 택시가, 날, 쳤어!
나: ??????
그렇다. 남자친구는 술에 취한 상태였고 (고량주를 무려 세 병이나 마셨다고 한다) 택시가 정강이를 치고 "아 그렇습니다" 하고 웃으면서 그냥 가버렸다고 한다.
내가 아무리 애인에게 무심해도, 술취한 채 돌연 뺑소니를 당했다는데 아무 걱정도 반응도 없을리는 없지.
버스가 끊기면 어쩌나, 제정신이 아닌데 잘 들어갈 수 있을까, 길을 잃고 방황하는 건 아닌가, 2차 사고가 나는 게 아닌가, 넘어져서 머리라도 다치면 어쩌나,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마침 박람회 때문에 하루종일 서서 일했기 때문에 피로가 몰려오던 참이었는데, 내가 잠들어버리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어 불안한 마음에 눈을 부릅뜨고 쏟아지는 졸음을 견뎌냈다.
택시를 불러준다 해도 (정확한 위치를 몰라서 택시도 못 잡음) 보고싶다는 말만 되풀이하더니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것 같아 보였다. 그래서 적당히 마무리하고 끊으려는데, 그런 상황에서 보고싶다고도 장단 맞춰서 "나도~"라고 대답하기도 황당하고 우습지 않은가 씨발? 대책이라는 게 없다.
어쨌든 괜찮다는 말을 듣고 전화를 끊었다. 물론 정말로 괜찮아 보이진 않았다. 그는 틀림없이 산산이 조각난 세계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술에 취했다"는 자연스러움을 빙자하여 고행을 자처하는 억지스러움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살짝 넋이 나간 상태로 머리카락을 말리고, 내일 업무를 정리하고 자려고 하는데 몇 분 후 또 전화가 걸려와 있었다. 다시 전화를 거니까 뭔 헛소리를 신나게 떠드는지, 하.... 경련을 일으킬 정도로 말이 안 통했다. 아무래도 같은 자리에서 맴도는 것 같아 경찰에 도움을 요청할 마음으로 통화를 녹음했다.
112에 신고하니 부산 경찰서에서 전화를 받았다. 아마 내 휴대폰 위치 기반으로 가장 가까운 상대방이 아무리 술에 취한 상태라도 위치를 추적하려면 경찰이 내 쪽으로 출동하여 직접 대면 조사를 해야 한다. 그런데 밤늦은 시간이었고, 나는 노브라에 이미 잘 준비를 마친 상황이었으며....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서 일단 상황을 지켜보기로 한 채 끊었다.
그러다 여전히 걱정되는 마음으로 음성 녹음 텍스트를 읽어봤는데... 상대방이 내가 걱정해주는 게 좋다며 헤벌레 웃는 게 아닌가? 나는 걱정하면서 얼굴이 죽상이 되어 잠도 못 자고 있는데 그게 좋다고 웃어?????? 더군다나 내가 음주에 대해 썩 긍정적이지 않는다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으며 심지어 예전에 술주정 하지 말라고 메시지로 대놓고 표현했음에도 이런 식이라고???
상대는 타인을 훈계하고 가르치려 드는 오만한 인간을 혐오한다면 나는 비슷한 정도로 술주정을 일삼는 유형을 혐오한다. 내게 있어 취객은 그저 질서없이 굴러다니는 기괴한 모양의 공밖에는 안 된다는 것이다.
보아하니 이 사람도 (예전에 짧게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에너지 뱀파이어들처럼) 나를 통해 자기가 이해받고 사랑받고자 하는 게 전부였던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까 엄마가 아닌 어떤 여자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지지가 필요했던 것이고 얼척없게도 그 주체로 내가 얻어걸린 것이다, 씨발.
누군가가 자신의 밑바닥을 모두 이해하지 않을까 하는 환상을 품는다는 것 자체가 지나치게 순수하다는 이야기라 살짝 안쓰럽기도 하지만, 어쨌든 실망이 너무나도 컸고,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리고 말았다. 나는 주관과 호불호가 뚜렷한 인간이지 누군가의 결점과 모난 점들을 조건없이 수용할 수 있는 로봇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두번이어야 넓은 아량으로 받아들이지, 수 차례 반복된다면 결코 용납할 수 없다. 용납해서도 안 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