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2020.10.17
헨리 데이비드 소로 <윌든>
- 일의 노예가 되는 것은 옳지 않다. 인간의 육신은 곧 토양으로 섞여 들어가 퇴비로 변한다. 옛 책에 쓰여 있듯이 사람들은 흔히 `필요' 라고 불리는, 운명처럼 보이는 것에 발목을 잡혀 곧 좀먹고 녹슬고 도둑이 침입해 훔쳐 갈 재물을 축적하느라 안간힘을 쓴다. 그리고 마침내 죽을 때에 이르러서야 이것이 바보 같은 삶임을 깨닫는다.
-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과 삶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그것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교리문답 식으로 따져보면, 사람들이 통상적인 삶의 방식을 선호했고, 그래서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본성이 영민하고 건강한 자들은 해가 분명히 솟았다는 것을 기억한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고정관념을 버려라. 예부터 전해온 관습이라도 유익하다는 증거가 없으면 과감히 버려라. 오늘날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진실이라고 말하거나 암묵적으로 진실이라고 인정하는 것일지라도 내일이 되면 거짓으로 드러날지 모른다.
- 우리는 생존에 필요한 열을 보존하여 몸을 따뜻하게 유지한다. 그러나 우리는 음식, 의복, 안식처를 확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집이라는 안식처 안에 더 따뜻한 일인지, 즉 잠옷과도 같은 침대를 마련하기 위해 마치 두더지가 은신처 깊숙히 풀과 나뭇잎으로 잠자리를 마련하듯 새의 둥지와 가슴의 깃털을 빼앗기까지 한다.
사치품과 생활상 편의라고 하는 것들은 대부분 불필요할 뿐 아니라 인류의 삶을 고양시키는 데 분명히 방해가 된다. 사치와 안락으로 말하자면 가장 현명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보다 더 검소하고 소박하게 살았다. 철학자들은 동시대 사람들과 똑같이 먹고 자고 입어서는 안 된다.
- 철학자라면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방법으로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열을 보존해야 한다. 내면이 아름다운 사람은 가뭄에 콩 나듯 흔치 않은데 훌륭한 외투를 걸치고 껍데기만 번지르르한 사람들은 넘쳐 난다. 만약 인간이 모두 벌거벗었다면 누가 어느 계층에 속하는지 구분할 수 있을까?
내면적인 변화 없이 옷만 새것으로 바꿔 입는 사람은 위장 깃발을 달고 항해하는 해적과 다를 바 없으며, 인류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속이는 것이다. 옷은 가장 바깥쪽의 표피이자 세속의 번뇌에 불과하다. 호화로운 옷은 피부의 각질에 불과하고 삶의 본질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으며, 그 옷을 훌훌 벗어 던진다 해도 치명적인 부상을 입지 않는다.
- 문명이 발달하면서 우리의 주택도 개선되어 왔지만, 그 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집만큼 개선되지 않았다. 문명은 궁궐 같은 집을 창조했지만, 저택에 걸맞은 기품을 지닌 인간을 창조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문명인이 야만인보다 더 가치 있는 목표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저 구질한 생활 필수품을 장만하고 안락하게 살기 위해서 평생 일해야 한다면, 문명인이 야만인보다 더 좋은 집에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궁정의 마무리 장식을 하는 석공이 밤에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집은 인디언의 오두막보다 나을 바 없는 초라한 오두막이리라.
- 유행을 만들어 군중들이 그것을 쫓도록 만드는 사람들은 사치스럽고 방탕한 이들이다. 원시 시대에 인간의 삶은 소박하고 진솔했으며 자연 속에 잠시 머무는 여향자의 여정을 의미했다. 그 시대의 인간은 허기를 채우고 단잠을 잔 후 원기를 회복하면 다시 길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러나 보라! 인간은 자기가 사용하는 도구의 도구가 되어버렸다. 허기질 때 과일을 따 먹던 인간은 농부가 되었다. 나무 그늘에서 안식처를 찾던 인간은 집주인이 되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야영을 하면서 밤하늘을 보지 않으며, 땅 위에 정착했고 하늘을 잊어버렸다.
- 자신에게 반드시 필요한 노동을 체계적으로 회피하여 여유로움과 은퇴를 얻는 자는 여유를 가치 있게 만드는 경험을 스스로 박탈할 뿐만 아니라 여유를 천박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시킨다.
교수의 가르침 중에 사는 방법을 가르치는, 즉 삶의 예술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는 망원경이나 현미경으로 세상을 둘러보는 방법은 가르치되 육안으로 세상을 보는 방법은 가르치지 않을 것이고 화학과 역학은 가르치되 빵이 어떻게 구워지고 동력이 어떻게 얻어지는지는 가르치지 않을 것이고 혜왕성 주위를 도는 위성은 새로이 발견하면서 자기 눈 속의 티끌은 보지 못하고 자기 자신이 위성처럼 우주를 떠도는 부랑자 같은 존재인지도 깨닫지 못하며 식초 한 방울에 담긴 미생물들을 관찰하느라 주위에 떼 지어 꿈틀거리는 괴물에게 잡아먹히는지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다.
- 불순한 선행만큼 악취가 진동하는 것은 없다. 그것은 인성과 신성이 부패하여 풍기는 악취다. 내가 굶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추위에 떨 때 몸을 녹여주고 도랑에 빠지면 구해준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내 생명의 은인이 되는 건 아니다.
- 우리는 왜 그렇게 서둘러 인생을 낭비하며 사는가?
우리는 배가 고프기도 전에 굶주리게 될 것이라 단정한다. 사람들은 제때의 바느질 한 땀이 아홉 땀의 수고를 던다고 하면서 내일 아홉 땀의 수고를 덜기 위해 오늘 천 땀의 바느질을 한다. 우리가 하는 `일' 가운데 진정 중요한 일은 하나도 없다. 또한 내가 평생 받은 편지 가운데 우푯값을 하는 편지는 한두장에 불과하다. 신문을 편집하고 읽는 이들은 차를 마시며 한담하는 노파와 같다. 그러나 뒷공론에 목말라하는 이들은 한둘이 아니다.
- 구어는 보통 일시적이고 청각적이며 방언 같은 데다 동물처럼 어머니에게서 본능적으로 배운다.반면, 문어는 성숙과 경험의 언어다. 전자를 어머니의 언어라 한다면 후자는 아버지의 언어이자 신중하고 엄선된 표횬, 청각에 호소하기에는 너무나 심오한 의미를 지닌 언어, 거듭나야 배울 수 있는 언어다.
- 우리는 때때로 웅변가가 터뜨리는 달변에 경탄을 금치 못하기도 하지만, 고상한 문어는 덧없는 구어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높이 위치한다.잘 살펴보면 광장에서의 달변은 미사여구에 불과하다. 웅변가는 일시적인 분위기에 휩쓸려 눈앞에 보이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군중을 대상으로 말한다. 그러나 웅변가에게 영감을 주는 행사나 군중은 문필가를 산만하게 할 뿐이다.
- 사람은 누구나 잠이나 망상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릴 때마다 나침반의 방향을 읽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길을 잃고서야, 즉 세상을 잃어버리고 난 후에야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하고,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의 관계가 얼마나 무한한지를 깨닫는다. 도둑질이나 강도 행위는 어떤 이들은 지나치게 많이 소유하고 어떤 이들은 필요한 만큼도 소유하지 못한 사회에서만 발생한다. " 가진 것이 나무 그릇뿐이라면 인간은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
재독 후 추가 글귀
16.
나는 아무리 강렬한 경험을 하더라도, 이를테면 나 자신의 일부가 아닌 관객 같은 존재와 비판적인 시각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안다. 그 존재는 나와 아무런 경험을 공유하지 않으면서 그 경험을 기록한다. 그 존재는 당신이 아닌 것과 같이 나 자신도 아니다. 비극일 수도 있지만, 삶이라는 연극이 끝나면 관객은 제 갈 길을 간다. 관객에게 있어서 삶은 일종의 허구, 상상으로 만든 작품일 뿐이다.
17.
신은 혼자이지만 악마는 결코 혼자와는 거리가 멀다. 악마에게는 패거리가 많다. 악마는 하나의 군대다.
18.
우리가 그저 말 많고 시끄러운 수다쟁이라면 뺨에 턱이 닿을 정도로 바싹 붙어서 서로의 숨결을 느껴도 될 것이다. 그러나 사려 깊고 신중하게 말한다면 모든 동물적 열기와 습기가 증발할 수 있도록 멀리 떨어지기를 원한다.
19.
우리는 길을 잃고 나서야, 세상을 잃고 나서야 우리 자신을 발견하며,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와 우리의 관계가 무한하다는 것을 인식한다.
20.
열매는 시장에 팔려고 기르는 사람이나 사서 먹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진짜 맛을 보여주지 않는다. 월귤나무 열매를 따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그 맛을 안다고 생각하는 건 통속적인 착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