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2026.05.04
세어도 細於島 탐방기
이번에 방문한 곳은 세어도.
세어도 細於島 를 알게된 건 친구의 소설 <증광도> 영향이 컸다. 소설 속에 나오는 증광도는 아는 사람들만 아는 은밀한 외딴섬 영토고, 한국에서 증광도와 가장 비슷한 장소가 세어도라고 했다. 나는 언젠가 이런 곳을 찾아오길 내심 고대하고 있었다. 바다와 섬을 좋아해서, 느긋한 휴향지를 선호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사실은 온갖 불만과 짜증으로 인한 도피에 가깝다.
보통 사람들은 `고향'이라고 하면 친근하고 아름답고 정겨운 유년 시절의 어떤 장소를 떠올리는 것 같다. 내게는 그런 동화 속 고향이 존재하지 않는다. 심각한 호소와 열변이 오가고, 개미 떼들이 매일같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인구 과밀의 동네일 뿐. 만약 태어나기 전에 어느 지역을 고향으로 삼을지 결정권이 있었다면 망설임 없이 외딴섬을 선택했을 것이다.
세어도에 가기 위해서는 정서진호를 미리 예약해서 탑승해야 한다. 나흘 전에 사이트에서 배를 예약해두었다. 출발 시간이 오전 8시 20분이었다. 매일 오전 6시에 잠 아닌 잠에서 깨어나는 게 일상이라지만 휴일까지 새벽 기상으로 반납하고 싶진 않아 전날 인천 서구 근처 숙소에서 잤다. 숙소에서 히치콕의 영화 <현기증>을 보았고, 새벽 1시가 다 된 시간에 순두부찌개를 먹으러 다녀왔다.

아침 일찍 숙소 앞에서 택시를 불렀다. 예상보다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임시 선착장이 경인항 임시부두 쪽이었다. 선착장에서 정서진호를 타고 세어도에 도착하기까지는 10분 가량이 걸렸다. 정서진 이라는 배 이름이 흡사 누군가의 이름 같아 궁금해서 검색을 해보니 행정선 이름이라고 함.
승선하기 전 잠깐 앉아있던 자리에서 갈매기 똥을 깔아뭉개고 말았다. 옘병 ㅎㅎ 고등학생 때 정동길에서 까치가 허공에서 똥을 싸갈기고 튀었는데 마빡에 그대로 떨어져서 흘러 내렸던 기억이 났다. 가끔씩 내 의지와는 관계없는 그런 좆같은 일들이 일어난다. 똥을 밟으면 재물운이 생긴다는 민간 신앙을 떠올려본다.
세어도의 첫인상은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다. 오아시스라는 카페에 들어갔다. 현금이나 계좌이체만 허용되는 곳이다. 주인 아주머니는 노년에 근접한 나이인 듯 보였는데, 20년째 그곳에 거주중이라고 한다. <거미여인과 키스>의 첫 장을 펼쳤다. 주인 아주머니가 몇 차례 말을 걸어왔다. 조금만 있으면 수다쟁이들이 몰려들어 왁자지껄 웃고 떠들면서 분위기를 시장바닥으로 만들어버리겠지, 싶어서 짐을 카페에 맡겨두고 탐방에 나섰다.

둘러보니까 사람들이 밭일도 하고, 꽃과 나무도 심고, 길고양이도 기르며 담벼락 곳곳에는 그림칠이 되어 있었다. 까치와 비둘기가 구슬프게 우는 소리도 들렸다. 나름의 사람 사는 냄새랄까. 세속에 목마른 깡패들끼리 얼씨구 좋다 짝짝꿍 담합하면서 시끄럽게 구는 동네보단 낫지만, 그래도 인간이 존재하는 한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도 유유자적, 두문불출하며 살고싶다!
둘레길이 약 5km 정도 되었다. 걷다보니 더운 날씨가 아니었음에도 땀이 나기 시작했다.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아서 지도를 찾아볼 수 없었다. 걷다보면 길이 있겠지 싶어 오르막길, 내리막길을 무작정 걸었다. 150년 된 보호수도 보았고, 세어나무와 예쁜 꽃과 신기하게 생긴 벌레 그리고 갈대밭을 보았다.
휴대폰을 쓸 수가 없어서 오로지 팻말에만 의존하여 길을 찾아야 하는데, 화살표의 방향이 애매해서 중간에 엉뚱한 산비탈로 빠졌다. 길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모호한 지점이었다. 그냥 될대로 되란 식으로
낡은 창고가 있었다.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가서서 안쪽을 살펴보니 나무 판자와 마대에 담긴 임목 폐기물이 가득했다. <증광도>의 주인공이 생각났다. 중희, 뒤틀리고 일그러진 인간의 상징. 원인 모를 아버지의 죽음, 분노, 냉소가 수면 아래에 깔려 있다가 어떤 계기로 진실을 알아차리고 피의 복수를 꿈꾸는 인물. 예상해보건대 중희는 모든 것을 꿰뚫어버릴 듯한 섬뜩한 눈동자를 가졌음이 틀림없다.
물론 증광도는 미완의 작품이다. 중희의 아버지가 어떤 방법으로 장씨에게 살해당했는지, 또 중희가 섬에서 그 진실을 어떻게 알아냈는지도 설정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멋대로 이야기를 궁리해봤다. 아무래도 나는 현실보다 현실 너머의 세계를 더욱 좋아하는 모양이다.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학창시절 친구들, 수능과 재수, 부모님 등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학창 시절, 꽤 많은 학자들의 이론을 공부했지만, 머릿속에 남은 것이라고는 고작 해가 뜨고 지며 이따금씩 바람만 불어온다는 사실 뿐이 아니던가. 모든 것은 한 순간의, 찰나의 꿈에 불과한 일임을 우리는 왜 새까맣게 망각하고 사는가. 뭐 어쨌든 자세한 이야기는 기록에서 생략하겠다. 서로의 대책없는 심리 상태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질릴만큼 잘 알고 있는 처지라...
다시 카페로 돌아와 얼마간 책을 읽다가 육지로 나갈 채비를 했다. 이날 하루 종일 마주친 사람이 열 댓 명 정도 되는 것 같다. 마이너한 관광지의 매력이랄까.
카페 아주머니가 또 놀러오라는 말로 배웅해줬다. 또 올진 모르겠지만, 다음번에 온다면 꼭 도시락을 싸올 것이다. 배에 몸을 싣고 육지로 향했다. 허기와 피곤에 찌든 채였다. 승선 인원이 제한되어 있어서 조금만 늦었어도 한 시간을 더 기다릴 뻔했다.
짧지만 아름다웠던 시간으로 기억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