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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30
헤르만 헤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 현실의 세계는 이 현실 너머에 꿈으로 가득 차 있는 형상들의 세계를 감싸고 있는 얄팍하고 불안한 표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얄팍한 표피는 한 번만 딴마음을 먹고 찌르면 금방 구멍이 뚫릴 것 같았다.
- 인간의 정신이란 확고한 것, 형체가 분명한 것을 좋아하게 마련이라, 학문의 세계에서 정해놓은 기호들에 의지할 수 있기를 원하거든, 인간의 정신은 변해가는 것보다는 고정되어 있는 것을, 가능성보다는 현실성을 더 좋아하지. 오메가라는 활자가 뱀이나 새로 둔갑하는 것을 참지 못한단 말이야.
- 모든 것들이 불가사의했다. 아름다우면서도 슬프기만 했다.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인 것이다.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이 땅을 누비고 다니기도 하고, 숲을 가로질러 말을 달리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뭔가를 요구하고 약속하고 그리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여러 가지 것들과 마주치기도 한다.
- 이따금 양심이 찔리고 부담이 느껴지는 것은 간통과 육욕 때문은 아니었다. 딱히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죄를 저질러서 생기는 죄책감이 아니라 이미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생겨난 그런 죄책감이었다. 신학에서 원죄라고 일컫는 것이 어쩌면 바로 이런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사실 삶 자체에는 죄악 비슷한 것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 신음하고 있는 여인의 찡그린 얼굴에 나타난 여러 갈래의 표정은 그가 사랑의 절정에 도달한 여자들의 얼굴에서 보았던 표정과 거의 구별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얼굴에 나타나는 엄청난 고통의 표현은 엄청난 쾌감의 표현보다 훨씬 더 격렬하고 더 일그러져 있었다. 그렇지만 그 두 가지 표정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히죽 웃는 듯이 몸을 움프리고 불처럼 타올랐다가 꺼져서 식는 것까지 모두 똑같았다. (고통과 쾌락이 마치 자매처럼 서로 비슷할 수 있다는 깨달음)
- 나르치스, 두렵니? 무섭니? 뭔가를 알아냈어? 그래, 이봐. 세상은 죽음으로 가득 차 있어. 온통 죽음 뿐이야. 울타리마다 죽음이 걸터앉아 있고, 모든 나무 뒤엔 죽음이 도사리고 있지. 그러니 너희들이 담장을 쌓아 올리고, 기숙사와 예배당과 교회를 지어도 아무 소용없다고.
- 모든 것이 거의 잊힌 듯한 과거가 되었다. 하지만 잊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견뎌 내고 지나갔을 뿐이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무엇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것은 뭔가 끔찍하면서도 소중한 것, 깊이 가라앉아 있으면서도 결코 잊을 수 없는 것, 어떤 경험, 혀 끝에 남은 맛, 심장을 옥죄는 고리와 같은 것이었다.
- 서로 편안하게 교양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몇 년씩이고 함께 생활하면서 작업을 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야. 이곳은 작업장이고 일을 하는 곳이지 잡담을 나누는 곳이 아닐세. 이곳에서는 이를테면 생각과 말로 할 수 있는 것은 통하지 않는단 말일세. 여기서는 오직 손으로 만들어 낼 줄 아는 것만이 통하지.
- 그의 머리에는 엄청난 인내, 방대한 지식과 사고, 그리고 인간이 행하는 모든 일의 가치가 의문스럽다는 것을 아는 사람 특유의 지극한 겸손함, 그러면서도 자신의 과업을 존중하는 믿음이 서려 있었다.
- 그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이 물처럼 흐르고 계속 변화하다가 마침내 해체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반면 예술가에 의해 창조된 자신의 모습은 영원히 변치 않는 똑같은 모습으로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모든 예술의 뿌리는, 모든 정신의 뿌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덧없이 사라져 가는 것 앞에서 몸서리를 치며, 꽃이 시들고 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노라면 슬픔에 빠지는 것이다.
- 우리가 예술가로서 어떤 형상을 창조하거나 사상가로서 어떤 법칙을 탐구하고 생각을 정리할 때면 우리는 그 무엇인가를 거대한 죽음의 무도로부터 구해 내려고 애쓴다.
- 예술은 아버지의 세계와 어머니의 세계, 정신과 피가 합일된 세계였다. 또 예술은 가장 감각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가장 추상적인 것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혹은 순수한 이념 세계에서 시작하여 가장 원초적인 육신의 세계에서 끝날 수도 있었다.
- 골드문트는 물고기들에 대한 연민에 사로잡혔으며, 인간들에게는 씁쓸한 불쾌함을 느꼈다. 어째서 인간들은 이토록 무지막지하고 거칠며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멍청하고 어리석은 것일까. 어째서 인간들은 모두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일까. 고기잡이 어부들과 그들의 아낙들, 시장 상인들은 어째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일까. 이렇게 벌어진 입들을,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이 눈들을, 거칠게 파닥거리는 꼬리들을 어째서 보지 못하는 것일까. 소름 끼치지만 아무 소용도 없는 이 절망의 몸부림을, 놀랄 만큼 아름답고도 신비로운 이 동물들의 변신을 어째서 못 보는 것일까. 물고기들의 죽어 가는 살갗 위로 소리 없는 최후의 경련이 스쳐 가고, 그러고는 죽음과 함께 생명의 빛이 꺼지고, 마침내는 식도락가들의 식탁을 위해 보잘것없는 고깃덩어리로 널브러져 있는 것을 어째서 보지 못하는 것이다.
- 태초의 어머니 상이 갖는 신비는 통합될 수 없는 이 세상의 가장 위대한 대립물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