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2025.06.26
밀란 쿤데라 <농담>
P .35
난 여자애들이 정말 끔찍하게 싫다, 젊음 속에서 잔인한 저 어린 여자애들, 마치 자기들은 언젠가 서른, 서른다섯, 마흔 살이 되지 않을 것처럼 자신보다 조금 더 나이 먹은 여자에게 일말의 연대감도 없는 그런 여자애들. 그런 여자애가 누구를 사랑했다든가 하는 이야기는 내게 하지 마라. 그 아이가 사랑에 대해서 대체 무엇을 안단 말인가.단지 이유 하나만으로 나를 이런 여자애들과 비교하려 든다면 매우 불쾌하다.
p. 48
실제로 나는 누구였던가? 다시 한번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나는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다. 나는 위선자들처럼 진짜 얼굴 하나와 가짜 얼굴 하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젊었고, 내가 누구인지 누가 되고 싶은지 몰랐기 때문에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p. 73
서로가 다 초면이고 익명인 불투명함 속에서는 , 타인에게서 거칠고 낯설기만 한 모든 것이 가차없이 발산된다. 우리를 묶어주는 단 하나의 유일한 인간적 연결 고리란, 불투명한 미래뿐이었다.
p.93
개인화되지 않을수록 그 여자에게는 영혼이 없을 것이며 그 편이 훨씬 나았다.
p.96
나는 내 운명, 여기 유배된 나를 암시하는 어떤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자연히 내 역사를 도시 전체라는 한 객체 속에 투영시키면서 어떤 위안 같은 것을 받기도 했다. 서로 이질적인 건물들이 들어찬 그 길들이 그 장소에 속하지 않듯, 나 또한 거기 속한 사람이 아니었다. 납작한 판잣집들로 가득한 이 흉측한 지역이 지난날 쾌적한 시골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바로 내가 이 곳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이 경악할 만한 부조화의 도시, 이질적인 모든 것들을 하나로 무자비하게 끌어안고 있는 이 도시, 이 곳이 내가 있어야 하는 자리라는 것을.
p.102
슬픔, 우울의 공감보다 사람을 빨리 가깝게 만들어주는 것은 없다. (그 가까움이 거짓인 경우가 많다 하더라도) 말없이 고요하게 서로 감정을 공유하는 이런 분위기는 그 어떤 두려움이나 방어도 잠들게 하며, 섬세한 영혼도 속된 자도 모두 감지할 수 있는 것으로서 사람을 가까워지게 만드는 방식 중 가장 쉬운 것이면서 드문 것이기도 하다.
p.105
2년 이상을 같이 보내야 할 사람들 앞에서 자꾸만 도망쳐 내 속으로 숨으려 드는 것도 우스운 노릇이며, 내 길을 지킬 권리를 달라고 외쳐대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도 이제 알았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의 변화는 단지 이성과 의지의 차원에 있는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나의 잃어버린 운명에 대해 내가 속으로 흘리는 눈물은 마를 수가 없었다.
p.114
내가 다른 이들보다 더 낫다는 그 어떤 보장도 내게서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타인과 나의 관계에 무슨 변화를 줄 수 있는가?내 한심함을 인식한다고 해서 나와 비슷한 이들의 한심함과 내가 화해할 수 있는 건 전혀 아니다. 타인에게서 자기 자신의 비천함을 발견하고 사람들이 서로 형제처럼 결속된다든가 하는 일만큼 내게 역겨운 것은 없다. 그런 메스꺼운 형제애는 사양한다.
p.128
중대장은 내게 그저 앙심을 품은 교활한 쥐새끼같이만 보였다. 그러나 오늘날 나는 그를 무엇보다 한 젊은이로, 연기를 하는 한 사람으로 보게 된다. 이들이 연기를 하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삶은, 아직 미완인 그들을, 그들이 다 만들어진 사람으로 행동하길 요구하는 완성된 세상 속에 턱 세워놓는다. 그러니 그들은 허겁지겁 이런저런 형식과 모델들, 유행하는 것, 자신들에게 맞는 것, 마음에 드는 것, 등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 그리고 연기를 한다.
p. 170
우리는 오로지 상황의 압력과 자기 보존 본능 때문에 가축 떼처럼 똘똘 뭉쳐 우글우글 몰려 있는 것일 뿐이며, 그런 식의 연대의식이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의심스러워졌다.
p. 213
현대인은 속임수를 쓴다.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중대한 순간들을 모두 교묘히 피해가려 하고, 그렇게 해서 아무것도 지불하지 않은 채 탄생의 순간에서부터 죽음까지 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