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2021.05.26
김훈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 개>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 개> 김훈 作
- 이 세상의 산골짜기와 들판, 강물과 바다, 비 오는 날과 눈 오는 날, 안개 낀 새벽과 노을 진 저녁들은 모두 입을 벌려서 쉴새없이 무어라 지껄이면서 말을 걸어온다. 말은 온 세상에 넘친다. 개는 그 말을 알아듣지만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한다. 사람들은 오직 제 말만을 해대고, 그나마도 못 알아들어서 지지고 볶으며 싸움판을 벌이고 있다.그러니, 사람 곁에서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개의 고통은 크고 슬픔은 깊다.
- 개의 공부는 매우 복잡해. 개는 우선 세상의 온갖 구석구석을 몸뚱이로 부딪히고 뒹굴면서 그 느낌을 자기의 것으로 삼아야 해. 그리고 눈, 코, 귀, 입, 혀, 수염, 발바닥, 주둥이, 꼬리, 머리통을 쉴새없이 굴리고 돌려가면서 냄새 맡고 보고 듣고 노리고 물고 뜯고 씹고 핥고 빨게 헤치고 덮치고 쑤시고 뒹굴고 구르고 달리고 쫓고 쫓기고 엎어지고 일어나면서 이 세상을 몸으로 받아내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지.
선생님은 많아. 이 세상의 온 천지가 개들의 선생님이지. 나무와 풀과 숲과 강과 안개와 바람과 눈비가 모두 개들의 선생님이고 세상의 모든 냄새와 소리가 개들의 선생님이야. 돌멩이와 먼지도 선생님이고 논두렁에서 말라붙은 소똥도 선생님이야. 개미나 벌이나 참새나 까치도 모두 선생님이야.
- 사람들은 부모 형제와 이웃과 논밭이 없으면 살 수가 없어. 그래서 사람들은 집을 짓고, 모여서 마을을 이루고 우물을 파고 땀 흘려 논밭을 일구는 거지. 또 죽은 사람도 잊지 못해서 산소를 만들고 다들 모여서 제사를 지내는 거야. 사람들은 개처럼 저 혼자의 몸으로 세상과 맞부딪치면서, 앞다리와 뒷다리와 벌름거리는 콧구멍의 힘만으로 살아가지를 못해. 나는 좀 더 자라서 그걸 알았어. 그것이 사람들의 아름다움이고 약함이고 모든 슬픔의 뿌리라는 것을.
- 등산화도 축구화도 조깅화도 장화도 군화도 없다. 그래서 내 발바닥 굳은살은 이 세상 전체와 맞먹는 것이고 내 몸의 모든 무게와 느낌을 저장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내 발바닥 굳은살로는 건너갈 수 없는 사람들의 세상에 가슴이 저렸다.
- 까닭 없이 짖는 개는 없다. 그러나 어느 때 짖는가를 보면 그 개가 어떤 개인지를 알 수 있다. 함부로 짖을 일이 아닌 것이다. 그 사람의 냄새나 표정이나 걸음걸이가 내 맘에 들지 않을 때 짖는다. 짖어서 겁을 주어 쫓아버릴지 그냥 통과시켜줄지는 오직 내가 정한다. 주인님도 내 결정에는 간섭하지 못한다. 짖느냐 마느냐는 내가 정한다.
- 개에게 중요한 건 언제나 현재일 뿐이다. 그래서 주인이 바뀌어도, 지금의 주인이 영원한 주인이라는 말은 개들의 나라에서는 맞는 말이다. 개들의 나라에서 영원' 이라는 말은 한 주인 곁에 끝까지 눌어붙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인 주인을 향한 마음이 영원' 하다는 뜻이다. 이 말은 내가 지나간 시절의 주인을 배반한다는 말이 아니다. 지나간 날들은 개를 사로잡지 못하고 닥쳐올 날들의 추위와 배고픔을 근심하지 않는다.
- 싸움은 슬프고 외롭지만, 이 세상에는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있다. 자라서 다 큰 개가 되면 그걸 알게 된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은 끝내 피할 수 없다.
- 할머니가 떠나면 나는 또 어디론가 팔려가야 할 것이었다. 내가 가야 할 곳이 어딘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 마을에 악돌이가 여전히 힘세고 사납게 살아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마을에서 흰순이 같은 개들이 풀이 돋아나고 바람이 불어오듯이 저절로 태어나주기를 바랐다. 저절로 되는 것들은 다들 저절로 돌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