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2026.03.29
이청준 단편 <자서전을 쓰십시다>
- 그것은 피문오 씨 특유의 어떤 체험이나 삶의 집적이 아니었다. 원고의 내용이나 말들은 피문오 씨 개인의 삶이나 인격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그것은 다만 그의 인기를 좀더 오래 지속시켜나가기 위해 꾸며낸 허황스런 말들의 집합일 뿐이었다. 더더구나 그런 말들을 모아 짜서 그 말로 된 동상을 짓는데도 피문오 씨 자신은 전혀 직접적인 관여가 없어온 터이었다.
- 자신의 과거사를 고백하는 데 있어, 남의 입을 빌린다는 그 원초적인 대필업의 오류는 이미 재언할 필요도 없는 일이겠지요. 뿐만 아니라 자기의 정직한 생의 궤적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말의 허구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그것들은 또 자서전 집필의 본뜻이 되어야 할 한 시대나 역사에 대한 진실의 증언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적어도 자기의 지난날을 뼈를 깎는 참회의 아픔으로 다시 들춰내 보일 수 있는 정직성이나 그 부끄러움을 박차고 나설 용기, 또는 자신의 과오를 폭넓은 이해와 사랑으로 어루만질 수 있는 성실한 자기 애정 같은 것들과도 아무 상관이 없음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 외견상으로는 누구보다 굳건한 신념의 소유자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사실은 자신의 과거에 대한 갈등을 일사불란한 신념의 옷으로 위장할 수밖에 길이 없는, 신념이 강해 보이면 강해 보일수록 그만큼 내면의 갈등 또한 우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 거짓 자서전은 그의 주인공을 영원한 과거 속에 감금시키는 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해독이 보다 광범하게 확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서전에 쓰인 말들이 그 주인공의 삶과는 별로 상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앞에서도 누차 말씀드린 바와 같습니다. 그러나 자서전은 한번 쓰여지고 나면 거꾸로 그것의 살아있는 주인공을 사로잡고 그를 지배하는 이상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오늘날의 자서전들은 그 대부분이 실상은 과거의 시제를 빌려 쓴 미래의 자기암시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 지욱은 차츰 선생의 그런 신념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지욱의 이해와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업는 어떤 무거운 압박감이 그를 못 견디게 짓눌러 왔다. 믿음이 논리를 초월할 수도 있다고는 했지만 논리적인 이해가 불가능한 신념은 맹목적인 아집에 그칠 위험성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감이 넘치고 있는 선생의 신념은 털끝만큼 한 자기 회의마저 용납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지욱이 그에게 소망해온 어떤 감동적인 자서전 인물상으로는 치명적인 결함일 수 있었다.
- 아무리 엄격한 극기의 세월이었던들 그것이 어찌 감히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욕망까지를 송두리째 근멸시켜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이 노인은 어찌하여 그것을 끝끝내 시인하려 들지 않고 있는 것인가. 그것이 진실로 그의 부끄러움이 될 수는 없단 말인가.
- 고장 난 시계나 라디오들 고칩시다아 ㅡ 채권 삽니다아 ㅡ 부서진 우산이나 빈 병 삽니다아 ㅡ 자서전이나 회고록들 쓰십시다아 ㅡ 어때? 장신이 내 자서전 일을 맡아간 것도 그런 식 아니야? 골목골목 외고 다니지만 않았다 뿐이지, 먹고살겠노라 애걸애걸 일을 맡아간 건 마찬가지가 아니었나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