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2026.02.21
남자친구가 사는 자취방 탐방기
어느 날 저녁, 태호의 단칸방을 처음으로 구경갔을 때 들었던 생각이다.
어떤 사람의 방안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사람의 사고 구조를 어느정도 읽어낼 수 있다. 모든 것이 현기증 날 정도로 각도 맞춰서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다면 그 사람은 완벽주의 성향이 강한 인간일 가능성이 높고, 온갖 잡동사니들이 무질서하게 널려있다면 정신 세계가 복잡할 가능성이 높다. 피규어나 예술 작품이 많다면 예술가적인 타입에 가까울 것이며, 최소한의 가구와 생필품만 비치되어 있다면 실용성을 추구할 것이다.
나는 지금껏 남자가 혼자 사는 방을 단 한 번도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막연하게 생각해온 이미지가 있다면, 책상과 옷장 그리고 침대가 투박하게 놓여 있는 모습이 전부였다. 예쁜 커튼과 화분, 꽃과 식물 따위 있을리가 없었다. 궁뎅이 긁은 손으로 팝콘이나 집어먹고 게임과 스포츠에나 열광하는 남자들에게 섬세함과 심미성이란 덕목을 기대할 순 없는 법.
아니야, 그래도 넌 다를거야.
도대체 무엇이 널 그렇게 무기력한 공상꾼으로 만든 것인가?
해답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가 사는 곳은 대학가 근처의 비좁은 방 한 칸이다. 사실 이전에 한번 구경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청소가 덜 되어서 약속이 미뤄져서 일주일 후에야 다시 가볼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집안을 들여다보고 실망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내비치며 부담감을 어느정도 덜어내려는 모양이었다. 아무렴, 미혹의 껍질을 벗겨내는 건 상관없다.
현관문을 열었다. 우선 특유의 습한 냄새가 났다. 달콤한 섬유유연제 냄새가 진하게 풍겨와 곧 머리카락에 스며들 것 같았다. 호기심을 가지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출입문 바로 앞에 싱크대가 있었다. 오른쪽 바로 옆에는 자그마한 냉장고가 있었고 쓰레기 봉투에는 정체모를 물체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는 늘상 집을 청소한다고 말했지만 청소를 자주 한 것 치고는 매우 엉성하게 치워져 있었다.
정면에는 흑백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세월의 변색이 묻어있는 전자렌지와 그 옆에는 책 몇 권이 먼지와 함께 겹겹이 쌓여 있었다. 책 제목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지가 수북했다. 벽지와 바닥 곳곳은 곰팡이에 절어 있었지만 뭐, 무너질 염려는 없어 보였다.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건 침대 말고는 없었다. 신발을 벗으려고 보니 현관이 따로 없다는 것도 뒤늦게 깨달았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어떤 종류의 불쾌감에 사로잡혔다. 불쾌감과 어떤 광기 같은 감정이 넘쳐 흐르는 물결처럼 밀려오는 걸 애써 억눌렀다. 어쩌면 그에게 있어 나를 좋아하는 마음은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는 주변을 둘러싼 모든 걸 제쳐두고 자기만의 세계에 몰두할 만큼 내면이 가득 차 있는데, 나는 도대체 뭔가? 난 너무나도 어리석고 머리에 아무것도 들어있는 게 없다. 기껏해야 남들보다 책 몇 권 더 읽었다고 역겨운 표현이나 인용하며 기록을 남기는 게 전부일 뿐이다.
문득 휘어진 책꽂이를 부러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물티슈를 가져다가 책장을 좀 닦아내고 싶었다. 쑥스러워하는 그를 뒤에 두고 고민에 빠졌다. 중요한 건 사랑일까, 글일까? 얼마간의 고심 끝에, 나는 사랑보다는 글, 그토록 고귀한 이성을 뒤흔들어 놓을 글, 내면과 혼연일체가 된 그의 글을 택했다. 그것이 좀 더 지고한 관점에서 봤을 때 길고 오래 갈 만한 것이었다. 이미 딥페이크 기술로 인간보다 훨씬 더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단계에 이르렀지만 난 결코 그의 글을 대체할 수 없다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