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2025.12.24
서머싯 몸 <인간의 굴레에서>
P. 70
필립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독서 습관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스스로는 깨닫지 못했지만, 그럼으로써 필립은 인생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를 마련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비현실의 세계를 만들어 냄으로써 현실 세계를 쓰라린 실망의 근원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P. 219
실천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불쑥불쑥 찾아와 괴롭히는 후회와 불안은 마음대로 막을 수도, 억누를 수도 없었다. 아직 한참 젊은 데다 친구도 거의 없어 죽음이 없는 삶에 대해서는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따라서 그것에 대한 믿음은 어렵지 않게 버릴 수 있었지만 한 가지 그를 참담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비이성적인 생각이 아니냐고 되뇌면서 그런 슬픔을 웃어넘겨 버리려고도 했다.
어떤 때는 신을 공경하고 믿음이 독실했던 선조들의 영향이 저도 모르게 작용하는 듯, 결국은 전에 믿었던 것들이 다 옳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푸른 하늘 저 너머에는 질투심 많은 신이 있어 무신론자를 엉겁의 불로 징벌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그때마다 그는 다시 끔찍한 공포감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P. 221
그에게는 연극이 진짜 인생이었다. 연극은 사람들 마음에 깃든 악이 냉혹한 작가의 시선 앞에 낱낱이 드러나는, 어둡고 고통스러고 낯선 삶이었다. 아름다운 얼굴 뒤에는 타락한 정신이 숨어 있었다. 점잖은 사람들이 미덕이라는 가면을 쓰고 악을 감추었으며, 강자로 보이는 사람들도 안으로는 형편없이 허약했다. 정직한 자는 부패했고, 정숙한 여자는 음탕했다. 마치 간밤에 난장판 파티를 치르고 난 이틑날 방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아침이 되었는데도 창문은 아직 열려 있지 않다. 공기는 먹다 남은 맥주 냄새와 퀴퀴한 담배 연기와 너울거리는 가스불로 탁하기 짝이 없다.
P. 223
필립은 인생의 나그네가 현실을 제대로 받아들이려면 그전에 메마르고 험준한 세상을 얼마나 넓게 돌아다녀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젊음이 행복하다는 것은 환상이며 그것은 젊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환상이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자기들이 비참하다는 것을 안다. 그들의 머리에는 끊임없이 주입되어 온 진실 없는 이상들만 가득 차 있어 현실과 접촉할 때마다 멍들고 상처받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어떤 공모의 희생자처럼 보인다. 선택의 필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읽게 되는 이상적인 책들과 망각의 장밋빛 아지랑이를 통해 과거를 돌아보는 나이 든 사람들의 말, 이 두 가지가 공모하여 젊은이들로 하여금 비현실적인 삶을 꿈꾸게 하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자기가 읽은 모든 것, 자기가 들은 모든 것이 거짓말투성이라는 것을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