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2026.01.17
앤서니 버지스 <시계태엽 오렌지> - 알렉스는 치료되지 않았다
앤서니 버지스의 <시계태엽 오렌지>를 빌려 읽었다. 영화로는 본 적 없고 대학생 때 한 번 읽은 적 있는 소설인데, 보면서 문득 얼마 전 읽었던 도둑 일기도 떠올랐다.
소설 속 세계에서는 전쟁, 살인, 폭력, 싸움, 갈등이 심심찮게 발생하며, 등장 인물들은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일들을 경험한다. 그래서 매우 극단적인 이야기, 이를테면 끔찍한 범죄를 다룬 이야기를 탐독하는 것이야말로 그 어떤 철학서보다 인간의 무의식을 탐색하는 데 유용한 방법론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실화 기반의 소설이든 누군가의 뇌피셜이든 말이다. 그
인간의 잠재 의식 속에는 예수와 부처 그리고 살인마가 공존한다. 우리가 "범죄의 영역"이라고 분류하는 것들에 대한 크고 작은 욕망을 누구나 예외없이 갖고 있다. 즉, 범죄에 대한 충동은 마치 뜯지 않은 포장지처럼 자연발생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냅다 범죄를 저지르면 현실적으로 처벌을 받거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수밖에 없으므로, 작가들은 소설과 같은 창작 활동을 통해 그런 욕망을 해소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잔혹한 범죄는 근본적으로 "나와 너는 다르다"라는 분별 의식으로부터 발생한다. 인간이 모기를 때려잡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것 역시 모기를 자신과 동등한 생명체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관계야 어찌되었던 타인을 자신과 똑같은 고통을 느끼는 존재로 바라보지 않을 때 끝없이 잔인해지는 게 인간이다.
주인공 알렉스도 통속적인 선악에 구애받지 않은 채 깡패 무리의 우두머리 노릇을 한다. 마약, 도둑질, 폭행, 강간을 일삼던 그는 어느 날 강도짓을 하다 한 노파의 목숨을 앗아가게 만들고, 그 일을 계기로 구속되어 감방에서 살게 된다. 그러다 석방 기간을 감면해주는 조건으로 루드비코 실험에 자원한다.
문제는 루드비코 실험이 연상 작용의 원리를 따른다는 점이다. 끔찍한 장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극심한 두통과 구토를 유발하는 약물을 투입하여 폭력적인 상황 = 육체적 고통 이라는 인식을 심어준다. 이 때문에 알렉스는 실제로 폭력적인 상황에 놓일 때마다 극도의 메스꺼움과 거부 반응을 나타낸다. 그야말로 파블로프의 개가 된 꼴이었다.
혼돈 끝에 알렉스는 "난 제대로 치료가 된 거야"라고 되뇌이는데, 내가 볼 땐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거듭난 게 아니라 알렉스 본인이 생각하는 모습으로 돌아갔다는 의미인 것 같다. 겉으로는 치료가 된 것처럼 보여도, 사실 범죄에 대한 욕구를 스스로 제어한다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육체적인 반응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 마치 푸코가 말한 "권력의 내면화"처럼, 자신이 세뇌당했다는 사실 자체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말이다.
애초에 선악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기도 하지만, 알렉스처럼 그 사실을 알고있는 인간이 범죄를 긍정한다면 무슨 방법을 써도 정상인이 되긴 글러먹었을 테고, 이런 인물이 현실에서 분명하게 존재할 법한 캐릭터라서 약간의 씁쓸한 감정도 느껴졌다.
아래는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어록이다.
"악의 원인이 무엇인지 고민하느라 발톱을 물어뜯으면서 연구한다는 말은 나를 웃게 만들어. 선의 원인은 밝히지도 않으면서 왜 그 반대쪽만 말하냐고. 만일 인간이 착하다면 그건 자기들이 원해서 그런 거니까 난 그런 기쁨을 방해할 생각이 없어. 그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야."
"더욱이 악이란 자기 자신이 유일한 존재, 즉 한 개인으로서 너 또는 내가 책임지는 것이고, 이때 자아란 하날님 또는 신에 의해서 만들어지는데 그건 신의 커다란 자랑거리이자 기쁨인 거야. 그러나 자신에 솔직하지 않으면 악이란 있을 수가 없지. 무슨 말인가 하면 정부 놈들이나 재판관들 또는 학교의 접장들은 인간의 본모습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악을 용납할 수 없는 거야." - 알렉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