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2026.05.17
술꾼이 되어가고 있다
태호랑 맥주를 잔뜩 마시고 늦은 시간에 돌아왔다. 같이 있을 땐 몰랐는데, 집에 와서 씻고 나니까 머리가 좆같이 아프다. 망치로 두개골을 찍어누르는 듯한 두통이다. 빈혈 때문에 컨디션이 안 좋은데 과음해서 그런 것 같다. 샤워하고 바닥에 대자로 나자빠져 있으니까 좀 괜찮아졌다.
사실 술로 재미를 보는 건 내게 썩 어울리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잔을 들지 않고도 충분히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알콜에 절어있는 사람들이 떠드는 말재간에 장단을 맞추다 보면 나 역시 함께 알콜에 절어버렸음을 상정하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내게 있어 알코올 같은 건 아무래도 실험실에서나 쓰는 소독약에 불과했다.
태호는 고통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늘 알코올 수혈을 받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동으로 악(惡)을 맛본다면 그는 생각으로 악을 맛보는 셈이라, 애주가로서의 운명은 이미 타고난 듯 하다. 취기가 올라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손가락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침착함도 잃지 않는다는 점도 대단하다. 때로는 술기운을 빌려 익살스러운 생각을 길어 올리는 것 같기도 하다.
태호랑 만나면서 나 역시 자연스럽게 술을 많이 마시고 있다. 근데 여기서 몇 가지 문제가 생긴다. 일단 난 술이 약하기 때문에, 술을 마시면 어지러움에 정신을 지배당한 채 머리를 장식으로 달아놓은 얼간이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취기의 그늘에서 벗어나 정신 차리면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혼자 반복한 것 같다는 사실을 깨닫곤 한다. 내가 세상과 인간에 대해 떠안은 불만, 그것이 대관절 태호랑 무슨 상관이라는 말인가? 그다지 바라지도 않던 동정, 이해 따위를 호소한 것 같아 후회, 현타, 부끄러움, 머쓱함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두 번째 문제는 정신을 지배하는 어지러움에 스스로를 내맡길 줄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성적인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어지러움이 어떤 종류의 "불쾌함"이었다면 이제는 약간의 "해방감"이 든다. 술에 취해 시야가 울렁거리기 시작하면, 나를 둘러싸고 있었던 온갖 겉잡을 수 없던 불필요한 생각들으로부터 잠시나마 빠져나오는 느낌이다. 그러다 아무 생각없이 멍청하게, 헤벌레 침이나 흘려 가면서 웃고, 그 반사적인 웃음마저도 "술에 취했으니까" 라는 말로 정당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정말이지, 얼마나 가볍고 또 책임도 없는 웃음인가.... 그 웃음을 빤히 바라보다 결국 똑같이 웃음으로 대답하는 상대에게는 또 얼마나 민망하고 쑥쓰러운 일인가...
뭐 사실 태호와 교제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어렴풋이 예감하긴 했었고, 이 정도는 굳이 문제삼지 않아도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어쨌든 위험한 도취에 결국은 빠져버리고 만 것이다. 정말 놀라운 변화다.
먼 발치에서 취객들을 쏘아보며 대체 왜 저렇게 사냐고 경멸하던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혼자 정신이 멀쩡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뭐가 또 멀쩡한 건진 몰라도) 술 취한 병신들 앞에서 씹선비질이나 하던 인간이 내일은 쉬니까 한 잔만 해야지, 태호랑 있으니까 마셔야지, 이따위 태세전환이나 하고 있으니, 얼레벌레 내로남불 꼴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애주가가 되어간다는 걸 유쾌하게 받아들이기가 아직은 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