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2026.07.26
난 아직도 예수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다
근래 일어났던 몇 가지 사건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주변인들과 마찰을 겪었던 것은 내 쪽의 과실이었다. 내가 느끼는 괴로움이란 본질적으로 갖고 싶은 장난감을 손에 넣지 못했을 때, 즉 소유욕을 충족시키지 못했을 때 어린애가 울면서 떼를 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예전에 한동석의 <우주 변화의 원리>에서도 읽었듯, 불교와 기독교의 본질은 동일하다. 불교는 자의식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탈을 목적으로 한다면 기독교는 그 반대로 현세에서의 신앙과 믿음, 그것도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수 있을 정도의 강한 믿음을 목적으로 한다. 빵과 포도주의 기적, 홍해의 기적, 동정녀 마리아의 수태, 예수의 부활 등은 모두 믿음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나'라는 존재 자체에 더 관심이 많고 그것이 모든 번뇌의 핵심인 사람들에게는 불교론적 방법이, 세속적이면서도 권위주의적인 성향이 강하거나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적 방법이 더 알맞다고 할 수 있다.
내 경우에는 양비론자에 가깝지만 굳이 기독교 관점과 불교 관점, 양자택일의 선택지가 있다면 후자를 택하고 싶다.
하지만 여기서 또 의심의 칼날을 들이밀어본다. '분별하지 말라'는 말 자체가 이미 '분별하는 것이 나쁘다'는 또 하나의 분별 아닌가. 순환 논법의 오류라고 하던가? 절대 진리따위 없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절대적인 주장이며, 모든 판단이 편견이라고 하면 그 판단도 편견이다.
이런 식으로 무엇이든 예외없이 싹 다 분별하고 차단막을 견고하게 형성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난 어떤 의미에서는 불교와 매우 상극적이긴 하다. 지금 내 의식 수준으로는 깨달음이나 해탈의 의식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고로 난 굳이 깨달음이라는 개념에 집착하고 싶지 않다. 다른 것들에도 마찬가지다. 잠을 자야 한다는 강박, 뭐든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강박과 열정도 버렸다.
최근 들어 애인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어떤 종류의 결핍이 가슴을 뚫는다. 그 좆도 아닌 게 쓰러지게 만들 정도로 아프다. 애인이 말마따나 상대에게 무엇도 바라면 안 되는데,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애정조차 바라지 않는다면 어떻게 관계가 성립하냐는 말이다. 내가 애인에게 애정을 격렬하게 갈구할수록 오히려 그는 가면놀이가 싫다며 방구석에 숨어서 소주를 병째로 들이부을 것이다.
어쨌든 본론으로 돌아와서 어떤 것을 붙잡으려 하면 할수록 멀어지는 법이다. 고로 분별심을 버리라는 말은 지나치게 분별하고 집착하는 사람들을 위한 하나의 처방에 불과하다. 우정도, 사랑도, 인간과 인간 사이의 모든 관계도 집착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바라는 게 있어도 집착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난 아직도 성경에 나오는 예수 삶의 결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세상에 호랑이가 자기 생존밖에 모르는 날벌레에게 봉사하는 꼴을 보았나?
멍청하고 미개한 인간들을 위해, 이기적이고 어리석고 배은망덕한 인간들을 위해, 그깟 제 하찮은 몸 잘 먹고 잘 살지밖에 생각하지 못하고 아무 발전의 의지도 없는 하찮은 불특정 다수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한 몸을 바칠 수가 있다고? 도대체 어떻게? 무엇을 위해?
예수가 훌륭한 이유는 자기 신념을 위해 죽었기 때문에, 자신의 사명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확신하고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인류의 죄를 구원하기 위해, 그런 생명의 본능에 거스르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 아니다.
그래도 기독교라는 종교가 표상하는 믿음에 대한 본질은 인정하겠다. 권력이나 부를 얻기 위해 행동하지 않고 자신을 욕보이는 사람들에게도 복수를 권하지 않고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수다.
타인의 죄를 구원하기 위해 못 박히기는커녕 제손톱 하나 내줄 자신도 없는 인간들은 메시아 구세주 타이틀을 함부로 남용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