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2026.07.08
인두겁을 쓴 자의 독백
자정이 다된 시간에 귀가했다.
마음이 답답해서 새벽 2시쯤 조용히 집을 나왔다. 옥상에 올라갔는데, 지난번 난간에 걸터앉아 있다 경비원이 발견하고 한 마디 했던 사건 때문에 문을 잠가놓은 모양이다. 몇 차례 발로 찼는데 문이 열리지 않아서 1층까지 계단으로 내려왔다.
텅 빈 동네를 산책했다. 광화문 광장 - 동십자각 - 열린송현 - 안국역 - 인사동 쪽으로 향했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날씨가 덥고 습해서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이 시간대에 작정하고 쏘다니는 미친년은 나밖에 없었다. 역시 나는 이상한 인간이다.
오늘의 스포티파이 선곡은 <My Heart will go on>, <레베카>, <Pet>, <아무도>, <연연불망>, <Time to say Goodbye>, <聖母たちのララバイ >, <Fury>, <Black Pearl>, <행복한 꿈의 나라>, <또 한번 사랑은 가고>, <즐거운 생활>, <La Pioggia>, <Beyond The Time>, <잠든 널 포켓 속에> 라는 곡이었다. 나와 비슷하게 선곡하는 사람이 있다고는 도저히 상상이 안 된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미친듯이 거리를 달렸다. 또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음량을 높였다.
이런 씨발, 보잘 것 없는 울보 같으니라고.
달리면서도 생각이 끊기질 않았다.
새삼스럴 것도 없이 찾아온 자기 성찰의 시간.
오늘만 해도 회사 대표님께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니 이제 무르익길 바란다"는 말을 들었고 친구에게는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라는 훈계와 비난을 들었다. 이 모든 갈등은 사소한 일에 분노를 표출했고 사소한 것에 폭력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친구가 자기 가방을 바닥에 내동댕이치면서 그러면 안 된다는 사례를 친절하게 보여주었겠는가?
이번에 화두로 삼은 주제는 "어째서 타인이 나를 조금이라도 기분 나쁘게 하면 미친듯이 분노하는가"에 대해서였다. 확실히 나는 분노조절 장애를 갖고 있고, 일반인보다 그 정도가 심하다. 어떤 것을 볼 때 내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거슬린다고 느껴지면 나는 미친듯이 분노하고 스스로를 파괴하려 든다.
어린 시절처럼 일단 분노하면 마음을 가다듬을 새 없이 뚜껑이 열리던 수준은 극복했지만, 타인으로부터 상처를 받으면 어떤 식으로든 앙갚음을 해야 속이 풀리는 나를 일반인들의 시각에서 보면 도대체 어떤 구석도 이해할 수 없는 정신 불구의 사이코패스일 것이다. 내게 돌아올 불이익이나 해코지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다. 그 순간만큼은 어차피 잃을 것도 없으니까.
나까짓것 따위 하나 죽는다고 슬퍼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흘렸던 눈물을 비롯하여 모든 인간의 눈물은 이기적이기 마련이니, 설령 슬퍼하는 몇몇 사람들이 있다 한들 그들의 슬픔은 본인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에 대한 추억과 회한 때문이지, 더 이상 삶도 미래도 없는 나에 대한 슬픔은 아니다.
이런 생각 한 줄 한 줄은 누군가로부터 이해를 받기보다는 꼬여 있다는 비난만 살 뿐이다. 사회 속에 속해 있으면서 사회와 단절되어 있는 꼴이다. 처음부터 그랬다. 누구에게도 고민을 나누고 하소연할 데가 없다.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취향과 사고 방식을 가지고, 남들이 관심 따위 없는 문제들에 골몰하는데 그 누가 한마디 위로를 해줄 수 있겠는가.
타인을 완벽하게 속이고 기만하며 철면피 인두겁으로 존재하는 것이 내가 유일하게 사랑 받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내면에 흐르는 끊임없는 비애의 원천이다. 지금껏 나한테 달콤한 말로 사랑과 우정을 속삭였던 인간들 중 밑바닥을 드러냈을 때 변함없이 품어주었던 놈들은 없었으며, 그것이 내가 인간이라는 족속들의 사랑을 믿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다. 참 이상한 일이다. 타인을 그토록 경멸하면서도 그만큼 사랑을 갈망하고 있으니.
기록을 쓰다 보니 생각이 났는데, 팔자가 좋다는 말은 그들이 내 정신적 비극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예쁘진 않지만 못난 외모도 아니고, 작은 키도 아니고, 열등감을 가질만한 학벌도 아니고, 친구들은 호의적이며 주식 투자 성과는 모두 빨간불인데다 증여 받을 부동산 재산도 몇 십 억원에 육박하는, 그러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갈망해 마지않는 조건들을 갖고 있고 최소한 먹고 살 동물스러운 걱정 따위는 전혀 안 해도 되는데 왜 행복하지 않고 미칠듯한 분노와 짜증 속에서 살아야 하는지 이해가 잘 안 된다.
그렇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할까?
이해가 안 되는 것을 그저 그렇게, 회색 분자처럼 어영부영 받아들일 게 아니라, 관점을 바꿔서라도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
확실히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기업적 야심이라던가 직업적 타이틀, 재력, 학벌, 명예 같은 잡스러운 것들을 행복으로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과 사고하는 방식이 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어느 날 문득 자각했다. 그러니 남들이 가끔 해주는 세속의 조언들이 내게는 하찮은 것이며, 그런 사물의 본질에서 명백히 벗어난 이야기들을 진리처럼 믿고 가공된 행복을 느끼는 주제에 날 고치고 개선하려 드는 사람들에게 경멸의 시선만 덧씌워지는 것이다.
직설적으로 써보자. 기질적으로 속물이 아닌 인간이 속물을 만났을 때 마주하는 당혹감, 혐오감, 메스꺼움을 속물들의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비록 본질은 다 같은 모습을 한 인간이지만 마치 오랑우탄 사이에서 인간으로 홀로 존재하는 기분 나쁘고 꺼림직한 느낌, 척박한 땅에 혼자 놓여있는 느낌, 따분함과 지긋지긋한 느낌만이 올라올 뿐이다.
이러한 심리의 기저에는 노르아드레날린 과분비의 탓도 있겠지만, 선천적으로 타고난 특성도 큰 것 같다. 매일 생각하는 부분이지만, 똑같은 것을 보아도 다양한 관점과 복잡한 의미들이 내 정신으로 한꺼번에 들어오기 때문에 타인과 쉽게 융화되거나 이너서클을 형성할 수가 없다. 그냥 삼전 주식, 맛집 얘기로 껄껄대며 무지하게 살며 일시적인 고독을 피할지언정, 한낱 껍데기 뿐인 처세술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당당하게 쓸 수 있다. 분명 나는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꼈다고. 음악 한 곡을 들어도, 문장 한 줄을 읽어도 거기에서 한 인간이 짜놓은 신성한 창조의 유희를 어렴풋이 느끼고 그것을 내 것으로 통합하여 나만의 체계를 확고하게 세우고자 했다. 다만 내 역량과 의지 부족 때문에 이러한 영감을 1/100만큼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철저하게 억압과 무시를 당해서 그것에 대한 분노가 겹겹이 쌓여 분노조절장애 환자가 된게 아닐까, 어이없는 망상도 해본다. 누가 오만하다고, 재수 없다고 성토해도 어쩌겠나, 이게 진실인 것을.
대표님이 하셨던 말씀을 다시 곱씹어본다. 벼가 고개를 숙이는 건 입추가 지난 다음이다. 처음부터 고개를 숙이는 벼는 없다. 무르익기 전까지는 해를 받기 위해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어야 하며, 그렇지 못하고 고개만 숙인 채 지낸 벼는 제대로 성장하지 못할 것이다.
뭐, 내가 아무리 거만해봤자 그저 수많은 80억 인간 중 하나, 변방 국가의 일개 시민 중 한 사람일 뿐이다. 그러니 나라는 존재에 대한 흥미는 오직 스스로에게나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오로지 내가 가진 모든 면모와 개성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는 사람과 교류하기로 다짐했다. 나와 동등한 주파수의 정신을 가진 사람을 만날 때에서야 비로소 이런 심리적 기능 장애가 해소될 것이며, 구태여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따위의 조언을 듣지 않아도 진정으로 자세를 낮추며 심신의 안정과 여유를 찾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인물이 주파수가 잘 맞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다만 더 이상 내게 공명하지 못하는 인물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한다거나, 성과를 인정받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던가, 애정이 식어버린 자에게 울고불고 사과하고 매달리며 애정을 갈구하지 않기로, 더 이상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기로 결의했을 뿐이다.
그것이 내게 훨씬 자연스럽고 잘 어울리는 일이며 본래 나 자신과 그나마 가장 가까운 모습이기도 하다.
타인을 잃어도 나 자신을 잃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