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2026.06.16
이청준 중단편 <제3의 현장>
주인공 백남희는 평범한 여가수인데, 어느 날 자신의 집에 침범한 의문의 남성으로부터 감금당한 강간을 당한다. 의문의 남성은 자신에 대한 백남희의 맹목적인 복종과 믿음을 확인하고, 왜 자신이 침범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사연을 구구절절 털어놓는다. (생략)
백남희가 사연 속 바닷가를 회상해보려 잠시 외출했고, 마침내 그를 역으로 구속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집쪽으로 차를 돌려 급하게 돌아온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현관 앞에 도착했는데 느닷없이 전축에서 자신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걸 듣고, 문앞에서 음악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데, 음악이 끝나는 찰나에 갑자기 탕 소리가 들린다. 의문의 남성 구종태가 백남희의 음악을 마지막으로 듣고 권총으로 자살한 것이다. 그리고 백남희는 자연스럽게 용의자(겸 목격자)가 되어 오 검사에게 진술하게 되는 뭐 그런 이야기다.
이야기를 읽으면서 백남희의 심리에 좀처럼 이입되지 않았다. 심리학적 인상만 놓고 보면 스톡홀름 증후군이 연상된다. 자기가 부른 노래가 범행의 트리거가 되었어도 자신의 집에 무단 침범하고, 강제로 덮치고, 말과 행동의 자유까지 앗아간 침범자의 내면을 어떻게 곧이곧대로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사건의 마지막 고비에서마저 그를 미워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미워하기커녕 모처럼의 탈출마저 단념하고 돌아와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처참한 실패를 자신의 실패이듯 절망하면서 그의 죽음 길을 보살펴주고 있었다."
"그는 어쨌거나 흉포하고 몰염치한 틈입자였다. 그리고 나를 무참하게 짓밟고 파괴한 악당이었다. 원한이나 저주가 없을 수 없었다. 배반과 복수가 가해져야 하였고, 그럴 기회를 노려야 마땅했다. 한데도 나는 전혀 그런 생각이 안 들었다. 복수나 배반은커녕 그에게 매달려들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토록 치욕스런 굴종과 파괴와 공포의 뒤끝에서 어떻게 그런 이해와 순응이 가능해지는지 스스로도 전혀 납득이 어려웠다."
" 그리고 나는 그것으로 이제 구종태의 범행의 발아를 이해한다. 그가 처음으로 서울을 올라오면서 차 속에서 나의 노래를 들었을 때의 그의 흉증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분명한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가 마침내 나를 선택하여 무참스런 파괴를 감행해오기까지 뜨거운 분노와 열망을 알 것 같다."
"그는 끝내 자신에 대해 입을 다물어버려야 했었다. 그랬다면 나는 그의 모든 것을 끝까지 이해하고 용납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그것은 차라리 그의 실패였다. 그의 실패이자 나의 실패였다."
백남희는 탈출을 시도해보지만, 이미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위압감과 한 차례의 폭력 앞에서 무력해진 후였다. 자신을 마음대로 다루도록 허락하고 총이 있어도 자발적으로 그를 쏘지 않았다는 점은 정말 구종태를 이해하고 믿어서가 아니다. 자유를 다시 찾기 어렵다는 사실 앞에서 체념하고, 스스로를 파괴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며, 구종태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아래와 같이 말한 것이다.
"묻지 않고도 이해하고 있다고? 듣기는 제법 좋은 소리지. 하지만 난 알고 있다구. 거기선 날 이해하고 있기커녕 내게 대한 이해는 생각조차 해본 일이 없다는 걸 말이야. 아무것도 묻고 싶지 않은 것은 내게 대한 이해의 문을 열어주고 싶지가 않아서인 것이지. 그저 모든 걸 내 뜻에 따르는 척 .... 그 복종에 거짓이 없더라도 그것은 그저 두려움과 체념에서 비롯된 것일 뿐, 그런 일방적이고 맹목적인 복종에 마음의 이해가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니지. 마음의 이해가 따르지 않는 곳에 진짜 믿음이 있을 수도 없는 거구."
"당신은 계속 일방적인 피해자로 남을 수 있으니까. 선량하고 무고한 무방비의 피해자. 부인할지 모르지만, 당신은 현명하게도 그 완벽한 피해자의 입장이라는 것이 뜻밖에 편한 데도 있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던 셈이지. 어쩌면 나같이 어리숙한 가해자의 입장보다 그쪽이 훨씬 더 마음 편하고 떳떳할 수 있다는 것을. 그래, 당신은 끝내 완벽한 피해자로 남기를 원했던 거지. 그러자면 나는 더 무도하고 잔인한 가해자가 되어줘야 했고. 자신의 삶에 대해 전혀 어떤 적극성도 없는 체념 빠른 무책임성."
범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비슷한 형태의 범죄 재발을 막기 위해서라도 가해자의 내면을 이해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세상 일이란 게 우리가 표면적으로 생각하는 것만큼 단순하지 않다. 그 누구도, 어떤 인간도 악의 고리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았으며, 적어도 인간이 의식적으로 개입하는 문제에 있어서 객관 혹은 그 객관에 준하는 상식, 개념 따위를 운운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전지적 작가의 시점에서 보면, 가해자와 피해자의 역할극은 나름의 의의를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연 가해자와 피해자는 누구이며 절대적으로 옳고 그른 일은 무엇일까? 우리 어리석은 인간의 지혜 따위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살아가면서 경험했던 사건에 대해 스스로가 절대적인 피해자나 가해자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저 그 순간 꼴리는 대로,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대로 주장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