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2026.05.24
그가 가진 한 줌의 지식과 인격만을 믿는다
상대방과 대화를 한다. 실제로 그 대화는 거울을 마주보는 것과 흡사하다. 우리 모두는 어떤 종류의 가면무도회 속에서 가면 놀이를 하고 있을 뿐이라는 어이없는 믿음을 고수하는 내게 있어서, 상대와의 대화는 곧 나 자신과의 대화다.
문득 이상하게도 내가 과거에 겪어왔던 특정한 일들이 미래의 어떤 시점에 누군가의 존재를 예감하고, 그를 위해서만 그렇게 지내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인물은 비록 환상 속의 그림자 같은 존재였지만 이제 확실하게 형상을 드러낸 터였다.
생택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나온 것처럼 그는 나의 집안 배경, 직업, 벌이만을 묻기보다는 어떤 정신을 가진 사람인지에 대해 순수하게 알고자 하길 원했다. 태호는 명품 시계보다 피카츄를 좋아한다. 변호사, 국회의원 배지로 누군가의 지적 수준을 판별하지 않았다. 거짓과 위선의 세계보다는 자신의 꿈 속에서 살기를 원했다. 위선과 무지의 파노라마 속에서 간신히 `좁은 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성찰한 끝에, 나는 누군가를 사랑으로 품을 그릇이 못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철없는 남자애들이 으레 하는 것처럼, 내 존재를 술자리 안주거리로 씹어먹으며 낄낄댄다면 나는 단검으로 가차없이 가슴에 큰 구멍을 내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과감하게 "큰일나는 쪽"을 택했고 그렇게 시간을 보낸지 벌써 몇 개월이 지났다.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고 보듬으려 노력해야지. 더 따뜻한 말들을 많이 하고, 자주 소통하고, 많이 웃어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