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2026.07.06
그래 같이 잔다는 게 꼭 섹스를 말하는 건 아니지
나: 나랑 잠자리 하기 위해서 만나는거야?
솔직하게 답해줘
상대: 내가 너랑 섹스 하자고 같이 자자고 한 것 같아?
아직도 그따위로밖에 날 못믿어?
그냥 들어가서 자
상대: 난 네가 이정도 말 따윈 아무렇지 않아서 평소에 그렇게 말하는 줄 알았어
무슨 보복이나 억울함에서가 아니라 앞으로 니랑 몸 섞을 일 없을 테니까 잠자리를 위해 만난다는 생각 안해도 돼
이런 일이 있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동네에서 함께 자고 가자는 이야기가 나왔던 것이다.
처음에는 무슨 스테이라고 써있는 건물에 들어갔는데 당일 숙박이 불가능했고, 종로에는 포시즌 신라스테이 같이 1박에 50만 원이 넘는 호텔 뿐이라 어쩔 수 없이 집으로 향하기로 했다. 나는 아쉬운 마음에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 거리가 먼 정류장까지 함께 걸어가던 길이었는데, 같이 잘 거 아니면 그냥 들어가라는 말을 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들어갔겠지만 만취해서 그런가 씨발 갑자기 눈물이 펑펑 나와서 집 건물 옥상에 올라갔다. 옥상에 올라가서 맨 땅바닥에 드러누워서 카톡을 보냈다. 어질어질 했다. 몇 시간을 쳐 울다가 밤을 꼴딱 새고 말았다. 밑도 끝도 없이 스스로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니가 왜 즙 짜고 지랄이야?
니 새끼가 맨날 가볍게 분노하니 상대방도 똑같이 행동하는 거 아닌가?
다 니 잘못이야.
넌 이기적이라서 사랑 받을 자격 없어.
내로남불 병신새끼 그냥 뒤져.
이미 여러 번의 연애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섹스가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나는 섹스에 대해, 그저 표면적이고 육체적인 관계를 떠나서 근본적인 하나됨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정조에 대한 관념도 뿌리째로 박혀 있었다. 평생 살면서 단 한 사람에게만 몸을 허락해야 한다는 그런 구시대적인, 어쩌면 어리석은 관념이다.
혼전순결을 고수하던 나에게 있어서는 오래된 가치관을 내려놓고 누군가를 받아들였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었다. 그를 완전히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기까지는 나름대로의 많은 고민과 용기 그리고 물리적인 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문득 첫경험을 시도할 때의 고통이 떠오른다. 정말 씨발 하반신이 동강나는 줄 알았다. 몇 달 전 이야기인데, 지금도 가끔씩 고통스럽긴 하지만 이제는 무색해졌다)
언젠가 상대에게 순결에 대한 생각을 물어본 적 있었는데, 별 의미 부여를 하지 않는다는 대답을 들었다. 나에게는 그만큼 싶은 신뢰, 헌신의 상징이었지만 상대에게는 친밀감 표현의 수단 중 하나일 뿐이었으니, 섹스에 대해 서로 생각하는 무게와 의미가 전혀 달랐던 것이다.
가끔씩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면 상대방은 그렇게 노력하면서까지 하지 말라며, 나와 더 이상 동침을 하지 않겠다고 한다. 그러면 내 입장에서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을 떠나, 상대를 향한 마음과 내 노력과 표현이 몽땅 부정당한 것 같아 섭섭한 것이다. 사후피임약 먹고 호르몬 체계를 망가져도 다 괜찮다. 그런 걸 감수하면서도 나는 상대방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니까. 근데 이야기를 꺼내면 또 두 번 다시 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 솔직하게 털어놓지를 못하겠다.
나는 그만큼 상대를 믿고 신뢰하고 사랑한다고 느꼈기 때문에 몸과 마음을 맡겼는데 이렇게 관계가 깊어갈수록 보상 심리 때문일까, 상대가 내게 더욱 큰 애정을 쏟아주기를 바라게 되면서 자꾸 불만과 서러움을 토로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럴수록 상대방은 짜증스러움, 귀찮음만 느껴질 테고, 나를 대하는 일에 점점 지쳐갈 테고.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비록 그 순간 자존심이 상할 수 있어도 내 노력을 알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을까 싶은거다. 두 번 다시 너랑 몸 섞을 일 없다는 말은 그동안 무늬만 남자친구 행세를 했던 새끼들에게도 들어보지 못했던 말들이었기에.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까 자존심이 박살나는 걸 떠나서, 내 존재 자체가 무너져 내리는 걸 느낀다.
그래도, 난 그 고통도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 또한 언젠가 비슷한 방식으로 상대의 마음에 생채기를 냈을테니 보기좋게 무너져 내려야 마땅하다 할 수 있겠다.
결국 내가 관계를 좀먹고 있는 것일까.
난 더 이상 애정과 배려를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이 기록을 쓰면서 아직도 눈물이 폭우처럼 쏟아진다.
이제 그만 찌질하게 울고 싶은데 내 의지대로 눈물이 안 멎어서 힘들다
하.... 씨발.
그냥 하염없이 먼 바다만 바라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