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2026.06.07
오토모 가츠히로 <Akira, 아키라(1988)>
アキラ (1988)
오토모 가츠히로의 <아키라> 라는 애니를 봤다. 일본 역대 최고 제작비가 투입되었고 우수한 작품성도 인정받았으나 개봉 당시엔 흥행 참패의 고배를 마셨다고 한다. 지금은 영국 평론가인 헬렌 매커시라는 인물이 선정한 `꼭 봐야할 명작 애니' 선에 포함되어 있다.
보통 명작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과 감정, 그로 인한 갈등이라는 근본 공식이 담겨 있고, 그런 본질을 잘 포착한 작품들은 시대가 흘러도 계속해서 회자되곤 한다.
내 기준에 아키라가 명작인지까지는 잘 모르겠다. 유명세 때문에 이름은 알고 있었는데 왠지 볼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고 결말도 난해해서 애니 특유의 극적인 감동에 도취되지 못했다.
그래도, 개인적으로 애니는 일본이 전 세계에서 원탑 급으로 잘 만든다고 생각한다. 귀엽고 말랑한 느낌의 서양 애니랑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배경 설계가 정교하고 퀄리티도 높다. 완벽을 추구하는 일본인의 미학이 잘 녹아있는 부분인 것 같다. 비록 온전하지는 않아도 마음에 호소할 수 있는 것이다.
이야기는 3차 세계대전 이후 재건된 미래 도시 네오 도쿄에서 시작된다. 배경은 (1988년도에 상상한) 2019년이고, 주인공인 카네다랑 테츠오는 폭주족 아이들이다. 붉은 바이크를 타고 미친듯이 질주하다 뭔가를 꼴아박는데, 사고를 당한 뒤 테츠오는 정부의 비밀 실험에 이송되면서 실험체로 활용된다. 그러다 잠재되어 있던 강력한 초능력(염력)이 깨어난다. 그 초능력은 자신조차도 통제가 불가능한 물리적 힘이었다.
알고보니 테츠오는 학창 시절 왜소한 체격과 병약한 이미지 때문에 항상 카네타로부터 보호받는 입장이었고, 항상 마음 속으로 강해지고 싶다는 열등감을 품고 있었다. 그의 초능력이 걷잡을 수 없이 팽창했던 것과 자신을 막으려는 카네다에게 오만하게 쏘아 붙이던 것도 다 억눌려 있던 욕망이 폭발했기 때문이었다.
카네다는 아랑곳하지 않고 폭주하는 테츠오를 막으려고 하고, 반정부 세력과 군부가 얽히면서 도쿄는 혼돈의 장이 된다. 테츠오의 몸집이 끝도없이 부풀어가는 광경은 실사 영화가 아닌 애니로 보아도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처음에 아키라가 특정 인물인 줄 알았는데, 신체 일부가 냉동 보관된 상태로 캡슐 안에 들어있는 형태로 등장해서 속으로 엥?했다. 중간에 아키라의 본래 모습이 등장하는데 그냥 평범하게 생긴 소년이었다. 마지막에 아키라의 힘이 개입되면서 거대한 폭발과 함께 카네다가 빛 속에서 테츠오의 어린 시절 기억 같은 것들을 목격한다. 그러고 끝이 난다.
문득 몇 달 전 보았던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떠올랐다. 에반게리온의 신지는 마음 속으로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가득한 겁쟁이 쫄보 소년이다. 결국 아버지의 등에 떠밀려 에바에 탑승하는데, 이런 식으로 결핍을 가진 소년이 큰 영향력을 발휘할 만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면에서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래서 마지막에 테츠오는 어디로 사라진 건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죽은 건 아닐테고, 그렇다고 이전과 같은 평범한 상태로 돌아간 것도 아닐테고, 뭔가 새로운 형태의 국면으로 끝난 것 같다. 검색을 해보니까 인간을 넘어선 존재로 사라졌다는 말이 있다.
아래는 챗지피티에게 물어본 결말 해석에 답변 요약본이다.
1. 테츠오는 ‘괴물’이 아니라 ‘진화 중인 존재’며 인간의 한계를 넘어가는 과정에 가깝다
👉 “신급 힘 + 인간의 미성숙한 자아” = 붕괴
2. ‘아키라’는 파괴자가 아니라 ‘차원 이동의 트리거’
👉 새로운 우주/차원을 여는 존재
3. 테츠오의 마지막 대사 “나는 테츠오다.” 의미
👉 “나는 이제 하나의 우주다” 라는 선언에 가까움
죽은 게 아니라 새로운 차원의 존재로 ‘독립’한 것
4. 카네다가 살아남은 이유 → 관계와 인간성 유지
👉 감독은 “진짜 중요한 건 힘이 아니라 인간성”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4번은 AI특유의 억지스러움이 있는데....
이런저런 해석들로 미루어 보아 HAPPY ENDING이라고 생각하려고 한다.
좀 애석한 점이 있다면, 지금의 나는 철저하게 현실에 입각하여 사물을 바라보는 데 익숙해졌기 때문에 재미있는 애니를 봐도 예전만큼 뜨겁고 진하게 감동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나이가 들수록 뭔가에 순수하게 열광할 수 없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니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어렸을 때 만화로부터 느꼈던 기분을 가끔씩 돌이켜보면, 삶이 본디 어떠해야 하는지 종종 상기하게 된다.
사람들이 만화, 애니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 안에 생명력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며, 주인공들은 단 한 순간도 쉴 틈 없이 움직인다. 마지막에 가서는 모든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고 사건의 내막이 밝혀진다. 이 모든 전개는 죽은 인간이 아닌, 살아있는 인간이 만드는 생생한 이야기다.
만화 속 세계처럼 현실에서도, 일상에서도 다양한 은유와 이야기들로 가득한 것, 생명력이 넘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