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2026.07.10
한국 공교육의 문제점
작년에 쓴 글.
기업은 말한다. 협업과 소통에 능하고 기본 상식과 창의성 같은 소양을 가진 사람을 원한다고. 하지만 그런 1등급의 인재가 뭐하러 자발적으로 기업의 노예가 되겠는가? 나를 포함하여 이 회사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공지능 툴보다도 지능이 떨어지는 `암기 기계'들임이 분명하다. 적어도 양산형 기출 문제를 풀고, 그 척도로 점수를 매기는 기준을 따른다면 말이다.
공공기관 인턴, 스타트업, 중소기업, 중견기업 이렇게 네 가지 유형을 경험했는데, 확실히 규모가 있는 집단일수록 말 잘 듣는 예스맨 얼간이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짙다. 더욱 아이러니한 건 학벌, 자격증 등 능력을 증명해야 소위 말하는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는데, 좋은 직장일수록 자기 머리로 독자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고 상부 지시를 따르는 것이 관례로 정해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그들은 교과서를 읊고 시험 문제를 척척 풀어내는 '시험의 전문가'로서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도처에 널린 지혜를 얻고자 사유하고 통찰하는 '지성인'이 아니다. 애초에 시험이라는 것도 학생이 배운 내용을 확인’하는 수단이지, 학생의 지능과 실력을 `평가’하는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전자보다는 후자에 목숨을 건다.
마찬가지로 영문장을 달달 읊고, 가우스-자이델 메소드 방정식을 무리없이 해결할 줄 아는 학생이라고 해서 고지능 천재는 아니다. 단지 시험에 숙달된 모범생이 될 수 있을지언정, 사고력과 창의성을 요하는 분야 앞에서는 상대적으로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닐 포스트먼이 말한 것처럼 인생을 위한 진짜 공부는 교정을 떠나고 난 뒤 현실 속에서 시작되는 법인데, 그들은 반쪽짜리 공부에만 에너지를 쏟아붓는 셈이다.
언젠가 켄 로빈슨이 쓴 <학교혁명> 을 인상깊게 읽은 적이 있다. 주입식 교육이 생긴 배경 자체가 국가 단위로 국민들을 통제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19세기 말에 미국인 마크 트웨인이 " 신은 태초에 바보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연습용이었다. 보다 진화한 신은 본격적으로 학교와 교육청을 창조했다." 라는 명언과 일맥상통한다.
공교육은 19세기 이후 산업화시대의 수요를 채우기 위해 생겨난 교육 방식이다. 기본적으로 위에서 지시한 사항을 아래에서 따르는 명령 하달식으로 구성되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문제 풀이 위주로 돌아가는 주입식 교육의 형태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뭐, 사실 주입식 교육 그 자체를 두고 문제점을 지적하는 건 지나친 비약에 불과하다. 모든 학문은 기초에 그 토대를 두기 때문이다. 대학생들이 복잡한 수식 문제를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는 것은 초등학교 때 덧셈, 뺄셈과 같은 기초를 배웠기에 가능한 일이다. 수채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색채 배합법을 배워야 하고,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악보 보는 법, 현 짚는 법부터 익혀야 한다. 어떤 분야든 학습을 위해서는 꾸준한 기초 숙달과 반복을 통해 일정 수준을 넘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유치원생, 초등학생에게만 유효하다고 난 생각한다.
어느 국가나 기본적인 교육 커리큘럼이 자리잡혀 있지만, 한국은 유독 주입식 교육의 특색이 뚜렷하다. 한 질문에 정해진 답을 찾아내는 객관식 문제들이 다수를 차지하며, 이 문제를 얼마나 많이 맞혔는가에 따라 점수와 등급 그리고 학위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원어민들은 수능 외국어 문제를 잘 풀지 못하고, 국어 영역에 출제된 한 시의 원작자 역시 자신의 시와 관련된 문제에서 오답을 고르는데, 고3 수험생들은 척척 맞춰낸다. 정말로 웃지 못할 현실이다.
우리나라 어른들도 개인의 동기부여나 재능을 인정하기보다는 고득점을 얻어 명문 학교 출신 인재가 되는 것을 최고로 여긴다. 소위 말하는 `국평오', 국민들의 평균을 낮잡아보고 비하하는 사회적 분위기만 봐도 말 다 했다고 본다. 그러니 부작용으로 신문 기사에 성적을 비관하여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연, 학업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학생들의 사연이 실리는 게 이상한 게 아니다. 너무나도 가슴아픈 현실이다.
"한국의 공교육을 보면 공장과도 같다. 반복을 하고 암기를 하고 정해진 스케줄에 따라 등교를 하고 하교를 하는 것이다. 마치 공장근로자들을 생산하기 위한 공장과 같은 기능을 학교가 하고 있는 셈이다." (앨빈 토플러, 미래한국, 2005.9)
"교수는 논문 건수만, 학생은 학점만, 총장은 글로벌 랭킹만 쳐다본다. 그동안 외형은 나아진 듯한데 스피릿(spirit·魂)은 죽었다." (서울대학교 이면우 교수)
“수업시간에 교사가 시험문제와 관련해 어떤 힌트를 줄 것인지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어떻게 돈을 버느냐에 머리를 굴리는 시간이 사고하고 사색하는 시간보다 훨씬 길다 (칭화대 청야오 교수)
한국 공교육에서 주입식 특성이 두드러지는 이유는 다른 선진국에 비해 산업화의 역사가 짧기 때문이다. 1960~80년대는 국가 차원에서 물자 산업 발전을 위한 전기, 물류, 기계와 같은 공대 출신 기술자들의 수요가 높았기 때문에 대량 인력 생산 방식이 유효했다. 이 덕에 21세기 전까지 국민들의 평균 교육 수준이 향상되었으며 각자 보유한 지식의 폭도 넓어졌다.
학생들은 시장에서 잘 팔리는 인재, 즉 인적 상품이 되기 위해 초등학생 시절부터 대학 졸업 전까지 시험 문제를 맞추는 일에 몰두하고, 학위를 따고 나서야 사회로 배출된다. 좀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취업과 스펙의 노예가 되고, 사회라고 불리는 `조직의 부속품'으로 들어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직종에 임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후에는 다음과 같은 잣대로 서로를 평가하고 우열을 매기기 바쁘다. 참 측은하고 안타까운 현실이다.
- 어느 대학을 졸업했니?
- 직업이 뭐니?
- 연봉은 얼마니?
우리나라 주입식 교육의 문제점
① 조기 교육의 폐해
분위기가 이렇다보니 미취학 아동 시절부터 외국어, 미술, 악기, 독서를 필요 이상으로 병행시키며 아이의 혼을 쏙 빼놓는 학부모들이 종종 있다. 부모 입장에서는 조기 교육이 안정적으로 느껴질지 몰라도, 아이 입장에서는 `왜’ 그것을 배워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주입을 당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마치 설익은 과일에 방부제를 잔뜩 뿌려 억지로 과숙시키는 것과 같다.
좀 뜬금없는 전개지만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조기 교육의 큰 피해자다. 당시 나랑 동갑인 송유근이라는 천재 아이가 조명받던 시기라 그 영향이 컸다. 나는 그 정도 공부 머리가 아님에도 5살 때 한글과 숫자를 떼서 덕수초등학교 조기 입학 허가를 받았다. 순전히 부모의 욕심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나이가 중요한 한국 사회에, 내 존재로 인해 족보가 꼬이고 관계가 엉망이 되는 해프닝이 잦았다.
어린 시절 2년의 갭은 굉장히 크다. 학습은 어찌저찌 따라가도 덜 자란 표가 나는 건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동급생들보다 신체 발달이 더딘 부분이 공부나 성격 형성 면에서 치명적인 단점이었던 것 같다. 중학교 입학 당시 체구에 맞는 교복을 구하기 어려웠고 동급생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어울리는 것도 불가능했다. 동생으로 다만 챙겨주고 놀아줄 뿐, 같은 친구로 여기지 않는다는 느낌을 무수하게 받았다.
고등학교 2학년쯤 되어서야 `맞먹는' 친구로 지낼 수 있었으나 그쯤 되니 이미 스트레스 때문에 먼저 나이를 밝히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삭아버리고 말았다. 지금은 웬만한 31살 동창들보다 키가 훨씬 커졌지만 아직도 친구들을 올려다보며 겉돌던 기억이 무의식의 상처, 자격지심으로 남아있다. 조기 입학, 조기 교육의 큰 피해자 중 하나인 셈이다.
우리나라 주입식 교육의 문제점
② 배움의 감동이 없는 무미건조한 학습
꼭 조기교육 때문에 그런 건 아니지만, 나는 고등학생 때 공부에 재미를 못 느끼고 아예 손을 놔버렸다. 원치도 않았는데 왜 경쟁에 내몰려야 하는지 반항심이 가득해서 그런 것도 있었고 근본적으로 재미가 없고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많았다.
가령,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은 각 동서양 문화권이 어떻게 상호작용하여 문명을 이루게 되었는지, 그것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파악하기보다 백 년 전쟁, 아편 전쟁, 을사늑약과 같은 개별적인 사실들을 떼어 공부한다. 과학을 공부하는 학생은 뉴턴의 역학,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복잡계 물리학으로 이어지는 흐름이랄까, 모종의 의미를 파악하지 않고, 그냥 `열역학 3법칙'이라는 압축된 공식을 대입하여 문제만 풀어대기 십상이다. 한마디로, 재미라는 게 없었다.
왜 굳이 문과와 이과를 딱딱 나눠 구분하는지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도 이해가 안 간다). 나는 자사고 2기로 입학해서 한국사를 배울 기회가 없었다. 본래 인문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수학과 물리성적이 높아 담임 교사, 부모의 강요로 울며 겨자 먹기로 이과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해서, 훗날 리처드 니스벳이 쓴 저서 <생각의 지도> 에서 "문이과 구분은 학습 방식이 서구화된 현상에 불과하다" 라는 대목에 격하게 공감한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인문계, 자연계는 본질적으로 다른 학문이 아니다. 인간의 두뇌 자체가 전체적인 큰 그림을 우선 파악하고 세부적인 사항을 이해하는 식으로 정보 처리를 하기 때문에, 문과 이과 예체능 식으로 구분지어 학습하는 건 부적절하다.
또한 “숙제를 끝냈으니 자유 시간을 주겠다” 라는 말, 이런 구시대적인 훈육도 보상 심리만을 자극할 뿐이다. 내키지도 않는데 달콤한 보상이 걸려있기 때문에 결국 그 보상을 얻어내는 게 목적이 되어버리고, 마지못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보상 심리는 주체의식을 원천 봉쇄하는 훈련이나 다름없다.
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자발적 동기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에게 의미 있다고 여기는 일일수록 더 높은 성과를 보이기 때문이다. 감동이 없고 무미건조한 학습은 인간을 기계화하는 작업에 불과하다. 따라서 공부할 때 가슴이 뛰도록, 학생들을 반짝반짝 맑눈광으로 만드는 교육 방침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