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2026.05.31
동성 연애를 생각하다 고등학생 때 허X현이 갑자기 떠오름
때는 2013년.
뭣 때문인지 화장실 칸 안에서 몰래 울다 눈물 닦고 나왔는데, 세수를 하다가 옆에서 전교 회장이었던 같은 반 허X현을 마주쳤다.
무안한 마음에 아 똥이 안 나와서 힘을 너무 줬나~ 눈이 왜 이렇게 충혈됐지~ 드립을 쳤고, 이 친구는 왜 울었냐고 진지하게 물어보았지만 친한 사이가 아니라 그냥 농담 따먹기나 하며 나왔다. 이후 우연히 짝이 되고 나서야 문득 그 일을 이야기하며 가까워진 걸로 기억한다. 이 친구 이야기도 듣고 보니 사연이 참 많았다. 복잡한 가정사에 앓는 지병도 여러 개 있었고.
확실히 이 친구와 나는 생각하는 게 비슷했다.
이 친구와 친해지고 나서야 그동안 내가 4차원 같다, 독특하다, 성격이 특이하다 라는 말을 들은 이유를 납득했다. 내가 객관적으로 특이한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대다수의 친구들과 관심 주제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특히 학업에 대한 고민을 많이 나누었다. 우리가 재학했던 고등학교는 과고나 외고를 준비하다 탈락한 학생들 혹은 고위층 자녀들이 많이 입학하는 자사고라서 면학 분위기는 좋았지만 나는 그걸 못 따라갔다. 전국 모의고사는 평균 1~2등급을 유지했지만 내신 성적은 6~7등급 언저리였다. 인서울은커녕 대학 진학 자체가 무의미한 상황이었다. 노력해도 제자리걸음이니 답답함과 고충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던 것 같다.
부조리도 이야기했다. 허언증 친구의 자작극에 휘말려 몇 달 간 피해를 당한 사건, 담임 교사 딸의 부정입학 사건, S 대학은 돈과 뇌물만 있으면 간다고 마음을 놓고있던 당시 새X리당원의 딸, 도피 유학을 권유하던 교사, 신입 교사를 향한 타 교사들의 갑질을 목격한 일담, 딸을 스파르타식으로 강하게 키우겠다는 아빠의 신념이 폭력으로 번져가는 과정 ... 당시 나는 죽은 친구가 부럽다는 망언을 늘어놓기도 했다.
성(性)에 대한 이야기도 솔직하게 나누었다. 아니, 이건 나누었다기보다는 내가 일방적으로 떠들어댄 편에 가깝다고 해야 한다. 친구는 부끄러움이 많아서 말을 아꼈지만 나는 생각한 모든 걸 그대로 내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건 비밀이었지만, 당시 연락하던 강 모 군 영향이 컸다. 그의 신상을 밝히지는 않았고 그냥 남자애들은 왜 이렇게 가슴을 좋아하는 걸까 뭐 이런 식의 진지한 고찰도 해봤다. 지금 같아서는 절대 그렇게 안 하겠지만.. 쓰고 보니까 흑역사가 따로없네 옘병...
우리 둘이 친해진 덕분에 같이 다니던 각각의 친구들끼리 친해졌지만 우리는 무리에서 종종 일탈하여 둘만의 시간을 보냈다. 서로 비밀을 공유한다는 유대감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한 말의 진정성을 이해한다는 느낌 때문인지 다른 친구들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이성 친구들과는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정서적인 거리감을 유지하고 선을 긋는 습관이 있었지만, 동성 친구들에게는 예외였다. 동성끼리는 무슨 행동을 해도 오해를 살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네가 좋아, 너 같은 친구는 처음이야, 너와 평생 같이 살고 싶어 라고 솔직하게 표현했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당연히 그 친구가 좋았고, 그것이 진심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발단이었다.
내가 좋다고 말한 후, 나를 대하는 이 친구의 태도에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었다.
사회적 편견을 내려놓고 생각해봐도 나는 분명 허X현을 좋아했다.
상상만 해도 설레이고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녀에게 나와 비슷한 정도로 가까운 동성 친구가 생긴다면 뭔가 섭섭할 것 같긴 했다. 내가 "단짝 1순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만큼 좋은 친구라면 내게도 소개를 부탁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 같아서는 상상조차 안 할 일이지만 10대 시절에는 부모님께 정서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고 형제도 없어서 친구라는 존재가 전부였기에..
그런데.....
어느 날부터 이 친구가 내 말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메시지에 답장도 없고, 가서 툭툭 치면서 불러도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불현듯 단기 기억 상실증이 있다는 그 애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옆에 가서 야, ㅇㅇ아, 나는 네가 제일 좋아하는 ㅇㅇ이야, 이런 식으로 귓속말을 했다. 그럴 때마다 허X현은 고개를 돌리는가 하면, 담요를 뒤집어쓰고 엎드려버렸다. 마치 나 너랑 더 이상 얘기하기 싫어 라고 대답하는 듯 했다.
며칠 동안 치욕을 감수하고 계속 말을 걸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수시 원서를 쓸 때도, 수능이 끝날때까지도 졸업식을 할 때도 이 친구는 나를 마치 없는 사람인 냥 시큰둥하게 취급했다.
내가 싫어진 걸까?
내가 질린 걸까?
난 상처를 받아서, 별의별 뭐 어처구니 없는 망상을 다 했다.
친구가 진심으로 걱정되었지만 지쳐서 결국 포기했고, 관계는 그렇게 시시하게 끝났다.
음...
지금와서 생각해보건대...
단기 기억 상실증이라는 주장은 아직도 심히 의심스럽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