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2026.07.03
종교 활동은 곧 사회 생활이다
직장 동료 중에 박학다식하고 쾌활한 사람이 있다. 상습적으로 우울증과 불면증을 달고 사는 나로서는 그 쾌활함과 밝은 성격을 본받고 싶다고 느낄 정도다.
그런데 좀 어이없게도, 그는 하나님의 교회 신자다.
짜치고 뭐고를 떠나, 아무리 봐도 하나님의 교회 같은 사이비 종교 집단을 믿을 정도로 추론 지능이 낮은 사람은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가끔 이야기가 나올 때면 황당한 생각이 든다. 프로젝트 전략을 짤 때나 기획안 공유해온 걸 보면 상당히 지식이 빼곡하고 합리적인 성격의 소유자라는 걸 누가 봐도 알 수 있는데, 어째서 안상홍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린다는 말인가.
예전에 14학번 동기 중에서도 하나님의 교회 광신도가 있었는데, 틈만 나면 어머니 하나님을 제 친구인 냥 들먹이는 바람에 듣다못해 빡돌아서 차단을 박았던 기억이 있다.
이들은 과연 진짜, 진심으로 안상홍을 아버지 하나님, 장재길씨를 어머니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저서 <고양이>에서 고양이의 입을 빌려 "인간들은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지기 싫어서 신을 만든 것 같아. 신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면 자신들이 섬기는 주인한테 복종만 하면 되니까. 자신들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은 신의 뜻이 되니까."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책임 없는 쾌락을 만끽하고 싶어서 신이라는 개념을 창조하고 자신의 과오를 신에게 떠넘기며 용서를 비는 것이다.
꼭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더라도 주변에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재미를 느끼기 위해, 친목을 위해 교회에 다니는 이들이 종종 보인다. 웃긴 건, 예수가 골방에서 혼자 기도하라고 가르쳤는데도 사제들은 교구에 소속되어 집사, 권사 따위의 계급을 나누며 사회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명상, 수행, 하다못해 신비 체험처럼 어떤 초월적인 영역에 대한 개인적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기관을 찾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다.
또 의사, 법률가,저명한 학자 중에서도 강한 종교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도 있고 반대로 보통 사람들 중에서도 논리에 기반하여 종교를 전혀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 참 흥미로운 현상이다.
이에 대하여 프랑스의 에밀 뒤르켐(Émile Durkheim)은 사회적 사실(social fact)이라는 개념을 정의했다. 법, 도덕, 관습, 종교와 같은 사회적 현상이 개인 외부에 존재하며 개인의 행동을 제약하는 힘을 가진다고 본 것이다. 그의 논지에 의하면, 결국 종교도 신을 믿는 것보다는 공동체 안에서 결속력을 다지고 유대감을 키우며 소속감을 느끼는 것이다.
옛날에 누가 이렇게 말했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어떤 저명한 인사가 종교의 존재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었다 신도들이 스스로 성스러움을 체험하면 성직자의 존재가 무의미해지기 때문에,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중재자(성직자, 교회) 없이는 신에게 다가갈 수 없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라고.
그래서 제도화된 종교는 영적 욕구보단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킨다. 처음에는 신의 계시와 인간의 사명 같이 영적인 목적으로부터 출발했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고 신도가 늘어날수록 권력·돈·정치·위계질서 같은 세속적 관심사에 힘을 쏟는 조직으로 변질되기 일쑤다. 당사자들이 못된 악마여서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모순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같은 인간의 관점에서 보았을 땐 그들의 나약함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이런 걸 보면, 인간의 지능과 신념 형성은 서로 다른 영역에서 출발하는 모양이다. 정보 처리 능력과 믿음에 대한 판단은 다른 부분이다. 어떤 것을 믿을지에 대한 판단은 가정 환경, 공동체, 정체성, 삶의 위기, 신뢰하는 인간관계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달라붙어 있다.
다시 생각해봐도 동료의 지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분명 그 명석한 지능으로 안상홍이 정말 신이 맞는지에 대해 반문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라고 나는 믿고 싶다....) 매주 안상홍의 이름으로 기도를 올리는 것도 확신과 믿음에 기반한다기보다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공동체가 주는 소속감과 유대감 때문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