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2026.05.23
레이먼드 챈들러 <기나긴 이별>
레이먼드 챈들러의 유명세 때문에 어쩌다 빌려읽게 된 소설.
대략적인 내용은 이러하다.
테리 레녹스가 피투성이가 된 채 말로에게 찾아와 아내가 살해당했다고 고백하며 멕시코 국경을 넘겨달라고 부탁하는데, 말로는 의리를 지켜서 그를 태워주고 경찰에 체포되어 취조를 받는다. 그럼에도 끝까지 테리의 행방을 함구한다. 그리고 로저 웨이드라는 알콜 중독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의 아내 아일린이 말로를 찾아와서 남편의 외박, 음주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다 로저 웨이드가 죽는다.
말로는 테리가 멕시코에서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주변인들은 사건을 일단락시키려 하는데, 뭔가 꺼림직함을 느낀다. 알고보니 테리 레녹스의 아내를 살해한 진범은 테리가 아닌 아일린이었다. 살해한 이유는 그녀가 자기 첫사랑이었던 테리를 잊지 못해서, 질투심과 집착으로 그의 아내를 살해한 것이었다.
진실이 밝혀지자 아일린은 자살한다. 그리고 죽은 줄 알았던 테리가 얼굴과 신분을 뜯어 고치고 말로 앞에 나타난다. 말로는 우정을 빌미삼아 자신이 이용당했다고 생각하며 인간에 대한 깊은 환멸과 배신감, 씁쓸함을 느끼며 종지부가 찍힌다.
"부둣가에서 작별 인사를 할 때는, 자주 연락하세, 친구, 그렇게들 말하지만, 이쪽이나 저쪽이나 그럴 일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십중팔구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한다. 설사 만나더라도 그는 이미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고, 특별 객차에서 마주치는 여느 로터리 클럽 회원들과 다를 게 없다."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환상과 집착으로 인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다는 대목에서, 얼마 전 보았던 히치콕의 <현기증>이 떠올랐다. 그런 걸 과연 진짜 사랑이라기보다는 사랑으로 빙자한 애착이 아닐까, 그리고 나의 연애 역시 그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사랑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 그저 내 결핍을 상대로부터 채우기 위함이며, 그것이 적절하게 채워지지 않을 때마다 상대에게 온갖 불만과 짜증과 화가 쌓여서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닐까.
여하간 한 인간의 심리는 "이렇다" "저렇다"라고 단언하지 못할만큼 복잡하고 미묘하며, 그로 인해 파생되는 인간 관계도 거미줄만큼이나 복잡한 그물망으로 얽혀 있다. 그런 인간 심리의 변화 과정을 레이먼드 챈들러는 적절한 타이밍에 잘 묘사할 줄 알아서 매번 읽는 재미가 있다.
내용과는 별개로, 사설 탐정이라는 직업은 참 매력적이다. 불법이든 아니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대신하여 목숨을 걸고 진실을 찾는다는 점에서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