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2026.05.18
역사도 과거도 없는 자와의 사랑이란
밥먹는데 뜬금없이 눈물이 줄줄 흘러나와 집 밖 계단 구석에 나가 존나 울다 들어왔다. 나조차도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뭐 통한의 눈물도 아니고, 실연의 눈물도 아니고....
태호는 오로지 현재 속에서만 살며, 과거나 역사 같은 건 없다고 한다.
그래, 현재가 중요한 건 사실이고 과거의 사건들을 낱낱이 살펴볼 필요는 없다.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생각들도 산더미같이 많은데, 과거의 기억들까지 어떻게 다 다루냐는 말이다. 또 아무리 역사적으로 실재하는 사건이라고 한들, 그 시점이 현재로 돌아오면 색채를 잃는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를 기억하는 나'일 뿐, `과거의 나'와 완전하게 동일한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분명 경험한 사건임에도 돌이켜보면 마치 단군 신화를 읽듯 관련없는 먼 나라 얘기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현재가 모든 과거의 파편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과거의 사건은 실재하며, 과거의 기억을 유지하는 것도 그 사람의 정체성 유지에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과거에 대한 이해 없이는 성장도 없기 때문이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도 과거의 반복된 패턴을 분석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니 아무리 지루하고 따분한 인생을 산 인간이라도 책 한권을 가득 메울 이야기 정도는 할 수 있고, 그렇게 한 해 한 해 살아온 날들이 축적될수록 과거의 기억에 기반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역사도 과거도 없이 현재 속에서만 살아가는 사람과의 사랑은.... 공허하다. 우리가 나눴던 수많은 대화들, 같이 보낸 시간들, 함께 공유했던 감정들이 결국 나 혼자만의 망상으로 귀결된다는 데에 허무함을 감출 수가 없다. 마치 단 한 명의 관람객도 없는 단막극 무대에서 홀로 열연을 펼치는 초라한 무명 배우 꼴 같다. 가슴이 찢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