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2026.06.22
엘라원정 부작용에 대한 경험
살면서 처음으로 임신 가능성을 걱정하는 경험을 해봤다. 예전에 서른이면 나이가 대단히 많은 노처녀였으니까 생물학적으로 이 나이에 아기가 생긴다면 오히려 축복받아야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근데 씨발 나는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기껏해야 처음 몇 번의 관계만으로 임신에 성공할 가능성은 드물다고 한다. 그러나 문득 돌이켜보니 가능성이 있는 날짜였고, 그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부터 온갖 상상과 걱정에 짓눌리기 시작했다. 강박사고 억제의 역설적 효과라고 했던가? 생각을 억누르려 할수록 계속 떠올라서 일이 손에 안 잡혔다. 커플들을 향한, 소위 말하는 사고쳤다 라는 비아냥댐이 내 이야기가 될 가능성은 정말이지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으니..... 만약 내가 임신을 하게 된다면 우리 둘 다 인생 골로 가는거지.
고심 끝에 가까운 병원을 찾아 엘라원정이라는 사후피임약을 처방받았다. 울리프리스탈 아세테이트 성분이고, 배란을 지연시켜 임신 가능성을 낮추는 원리라고 한다. 이미 배란이 된 상태에서는 피임 효과가 떨어질 수 있다고 해서 받자마자 집에 달려가 꾸역꾸역 밥을 밀어넣고 바로 약을 복용했다. 그리고 체육관에서 신나게 샌드백을 치고 왔다. 애새끼 따위 갖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몇 시간 정도 후에 수면약을 먹고 잤다. 그런데 꿈속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도중 속이 울렁대는 게 느껴졌다. 꿈속 상대 앞에서의 체면을 생각해서 울렁거림을 누르려고 애를 썼던 것 같은데 울렁거림이 극한에 달할 무렵 불현듯 어둠 속에서 눈이 떠졌다. 저녁에 먹은 햄 조각과 밥알이 뜨거운 위산과 함께 그대로 역류하려던 찰나였다.
바로 일어나서 화장실로 줄행랑을 치는데 씨발 토사물이 비강에 들어간 느낌. 다행스럽게도 토사물을 바닥에 쏟아내놓진 않았다. 화장실을 나오니 단테놈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돌이켜보니 바닥에서 자고 있다가 내가 일어나서 우웩대며 달려가니 화들짝 놀라 일어나서 쫓아왔던 것 같다.
하여튼 토악질을 해놓고도 특유의 메스꺼움이 가시질 않아서 한동안 뜬눈으로 뒹굴었다. 백퍼 엘라원정 부작용 때문인데, 성분이 흡수되지 않았을테니 재복용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근데 이 좆같은 걸 또 쳐먹으라고?
아마 남자친구는 지금쯤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었겠지... 싶은 생각에 서러움과 분노에 휩싸였다. 남자친구에 대한 분노라기보다는 관계에 부주의했던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에 가까웠고, 이따위 식으로 비대칭적인 자연의 섭리에 부조리함도 느꼈다. 왜 씨발 왜, 똑같이 관계를 하는데 왜 나만 매번 고통이 있고, 출혈을 겪고, 관계 후에도 리스크를 떠안고 고통스러워야 한단 말인가? 남성들도 원치않은 임신에 대한 책임은 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임신과 출산에 대한 리스크를 본인들이 몸으로 겪는 건 아니지 않은가?
사후피임약을 먹고 부작용을 겪었다는 이야기는 털어놓았지만, 이러한 속사정에 대해서는 상대쪽 입장을 생각해서 구구절절 털어놓진 못했다. 그가 자책하며 사과하는 모습도 더 이상 보고싶지 않다. 솔직히 써보자면 성관계보다는 함께 끌어안고 보내는 시간만으로 충분히 만족한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난 아이를, 한 생명을 품을 자신이 없다. 아이를 인간다운 인간으로 잘 길러낼 자신은 더더욱 없다. 오로지 내 책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부담스럽다.
생각해보니 그 두려움은 불안정에서 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남자친구의 애정과 사랑을 확신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는 아직 아버지 역할을 할 준비가 안 되었다. 그와 나 사이에 아이가 생긴다면 물질적으로 내 쪽에서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내 양친 쪽에서 반대할 가능성이 99.9%라 하겠다.
인간으로서 대를 잇는 것? 노후까지 내 편이 되어줄 가정을 꾸리는 것? 자식이 없으면 나이 들어서 후회할 것? 그래, 다 좋다. 하지만 늙은 꼬부랑 모친의 병수발을 들어줄 목적으로 아이를 낳아야 한다면 글쎄다. 나 역시 경제적 비용을 태워서 아이의 뒷바라지를 하며, 육체적 정신적으로 희생할 각오따윈 되어있지 않다. 안정적으로 가정을 꾸리는 것보다는 모험을 즐기는 게 신나고 재미있는 일이다.
이 세상에는 천착해야 할 주제들이 많으니 난 도파민과 모성을 맞바꾸기로 했다. 한낱 젊은이의 철없는 객기와 자신감이 아닌 진심을 다해 드는 생각이다.
앞으로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 더욱 신중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이상, 시시한 기록이었다.